주후 1세기의 그리스인 역사가 ‘스트라보’(Strabo)는 "모든 나라로 유대인이 스며들어, 지상에 유대인이 없는 곳은 찾아볼 수 없다."고 평하였다. 주후 66-73년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제1차 봉기 직전의 전 세계 유대인 인구는 대략 800만 정도로 추정된다.
이는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10% 수준으로 로마 황제조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민족이었다. 다시 700만 중에서 250만명 가량이 팔레스타인에 살았고, 나머지 450만 가량은 이집트, 소아시아와 시리아, 이탈리아 반도 등에 흩어져 살았다. 특히 지중해 연안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도시 전체 인구의 40%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북아프리카의 또 다른 지중해 연안 도시인 키레나이카(Cyrenaica, 리비아 제2의 도시인 뱅가지를 중심으로 한 지방)에도 10만 가량이 살았고,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시만 해도 대략 5만 가량이 살고 있었다. 이렇듯 유대인은 이들 지역을 위시하여 오래 전부터 프랑스, 영국, 그리고 라인 강 유역에 분산되어 집단을 이루면서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렇다면 유럽의 유대인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했을까? 유럽 문화에 뿌리를 내리긴 하였지만 그들의 조상언어인 고대 ‘히브리어’를 고집스레 유지하며 살아간 것은 아닐까? 유럽 유대인의 대다수는 ‘이디시어’(Yiddish language)를 오랫동안 사용해왔다. 이디시어의 모태는 AD 10세기경 독일의 ‘라인란트’(Rhineland) 지방으로까지 소급된다. 당시 라인란트 지역에는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북부에서 옮겨온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마을과 도시들이 있었다. 이들 공동체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독일어를 공통어로 사용하고 있었고, 라인란트를 기점으로 유럽 동부지방으로 이주하여 가기 시작했다. 독일을 중심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유대인들을 아슈케나짐(Aschkenasim)이라 일컬었는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독일을 지칭하는 ‘아슈케나즈’(ashkénaze)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면서 독일어와 엄연히 구별되는 독립 언어로 변해갔다. 그렇게 해서 정착된 언어가 ‘이디시어’(Yiddish)였다. 이 단어는 독일어로 ‘유대적인’ 뜻을 지닌 ‘위디쉬(Jüdisch)’에서 파생되었다. 독일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부를 남쪽으로 흐르는 유럽 제일의 볼가강 어귀, 폴란드, 벨로루시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이디시어를 사용하며 그들만의 전통과 문화를 구축해갔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유대계 이주자들이 이디시어를 사용하면서 1920년대 미국의 이디시어 신문 구독부수는 75만부에 이르렀다. 지금도 뉴욕 등 미국 유대인 사이에선 이디시어가 일정 정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발칸 반도, 근동, 아프리카 북부(모로코), 그리스, 터키의 제1의 도시인 이스탄불등지에서 ‘세파르딕 유대인’(Sefardic Jews)이 사용한 라디노어(Ladino language)를 사용하는 유대인들과 구별 짓는 데드라인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고 있는 라디노어! 스페인어에 토대를 두고 헤브라이어(語) 요소가 섞인 라디노어는 1492년 이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의 후손들에 의해 이들 지역으로 옮겨지며 쓰이게 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금융업 장악’의 계기 유대인들이 금융과 상업에 귀재라는 말은 전혀 낯설지 않다. 현지인들과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고수한 유대인들은 극심하게 박해받았지만 문맹(文盲)이 다수이던 유럽에서 대부분이 글을 읽고 셈을 할 줄 아는 민족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의 뛰어난 재능과 빈틈없는 수리에 감탄한 중세의 봉건영주들은 이들을 등용해서 회계를 맡기고 무역 관장을 위임하면서 전폭적 신뢰를 보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인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는 “유대인들은 돈 냄새가 나지 않는 곳으로는 이주하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중세 십자군은 유대인을 핍박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시켰다. 이들은 생계유지를 위한 다른 길을 필사적으로 찾아야 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교황의 칙령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땅과 집을 살 수 없도록 통제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천시 받던 환전업·대부업·전당업 등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동맥으로 간주되는 금융업은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죄악시하고 사회적으로 천하게 여겨 기피했기에 유대인들에게는 천우신조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는 이른바 현대 금융업의 태동의 씨를 뿌린 셈이 되었으며, 국적이 없는 방랑자의 처지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자본이동이 용이한 방법을 도모한 끝에 채권과 주식이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만들어낸 것이다. 유대인은 유가증권을 개발한 장본인이며, 그 첫 작품이 1654년 뉴욕의 뉴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최초로 만든 월스트리트 증권시장이다. 영국의 증권시장도 유대인들이 그 토대가 되었다.
기독교의 수치스런 역사 ‘유대인 대탄압’ 십자군전쟁과 함께 시작된 유대인에 대한 탄압과 배척은 다분히 종교적인 것이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혐오와 증오의 근원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이자 메시아에 대한 거부와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유대인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면서이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기독교의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나 박해는 계속되었다. 곳곳에서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재앙이 일어날 때 마다 유대인들이 희생양이 되어 대중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 단적인 실례가 전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 재앙이다. 14세기 중엽인 1340년에 시작된 흑사병은 17세기 중엽까지 300년 동안 유럽은 흑사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 인구가 감소하였다. 위생적으로 철저한 유대인의 흑사병 발병률이 현격하게 적자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의심을 받는다. 이에 유대인의 집이 불태워지고 살해되며 유대인 마을은 폐허가 되고 사라져 갔다. 또한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기독교 어린이들을 납치해서 어린이 피로 유월절 행사를 치른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퍼뜨려지며 유대인을 해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일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면서 유럽의 각 나라는 대대적으로 유대인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1096년 첫 십자군 전쟁 이후 영국(1290), 프랑스(1394), 스페인(1492), 리투아니아 (1495), 포르투갈 (1497) 등이 그랬다. 이들 지역에서 연이어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일단은 자신들을 용인하는 곳으로 이주했고, 그 지역 경제를 부흥시켰다. 반대로 그들이 떠난 곳엔 경제 침체의 그늘이 짙어졌다. 유대인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박해받고 추방당하면서 정처 없이 배회해야만 했다.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의 박해는 이들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기독교를 지독하게 거부하게 만들었고, 기독교세가 약하거나 부재의 땅을 찾아 헤매게 했다. 유대인들은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박해를 피해 동유럽으로 이주해 갔다. 15-16세기 서유럽의 유대인들이 동유럽으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폴란드, 루마니아 등 러시아 주변 지역에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 나라들을 영향권 하에 두면서 유대인의 고난은 다시 재개된다. 러시아는 수백만의 유대인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것을 짐스럽게 간주하면서 이들에 대한 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은 매우 잔혹한 것이었다. 3분의 1은 개종시키고, 3분의 1은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며, 나머지 3분의 1은 굶겨 죽이는 것이었다. 근대의 러시아 제국을 일컫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유대인들은 짜르 압제 하에 심한 학대를 받고 있었다. 공직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이동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급기야 1881년 4월 29일 러시아의 남서지방에서 반유대인 폭력 시위를 시발로 엘리짜베가르트(Elizavetgrad)에서, 키에브(Kiev)에서, 5월에는 오데사(Odessa)에서 살인과 약탈, 방화와 강간 등이 자행되었다. 이와 같은 포그롬(pogrom, 유대인에 대한 러시아의 박해와 대학살, 1881–1921) 이 계속되면서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과거에 그들을 핍박하던 서유럽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이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재앙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유대인은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다. 서유럽의 유대인 정착과 ‘離散의 비애’ 프랑스는 현재 약 70만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유럽 최대의 유대인 커뮤니티이며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막강한 사회다. 얼마 전인 2012년 3월 19일, 2만5천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프랑스 남서부 툴루즈(Toulouse)의 유대인 학교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해 학생 3명을 포함해 최소한 4명이 숨지고 1명이 다친 급보는 反유대감정의 비등점이 이르는 것은 아닌가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유대인 교육기관인 ‘오자르 하토라’ 학교 앞에서 헬멧을 쓴 한 남자가 갑자기 학생들을 추격하며 총을 난사한 뒤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난 것이다.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의 애증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1359년 프랑스는 재정난 때문에 다시 유대인들을 불러들였다가 1394년 9월 17일에 또 다시 결정적으로 프랑스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한다는 칙령이 떨어졌다. 이 추방령이 서명된 날은 비통하게도 마침 유대인의 속죄일이었다. 또한 현대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점령 하에 프랑스의 유대인 사회는 공포와 경악 그 자체였다. 독일 나치 영향력하의 프랑스의 비시정권(Vichy는 프랑스 중부 광천수로 유명한 지방 이름)하에 34만 명이던 프랑스의 유대인 가운데 9만 명의 살육에 일조했다. 그러나 전후(戰後) 30년 동안에 이슬람 세계에서 프랑스로 유대인 이민이 대량으로 유입됨으로써 숫자상으로는 충분히 회복되었다. 이집트에서 2만5000명, 모로코에서 6만5천명, 튀니지에서 8만명, 알제리에서 12만명이, 그리고 시리아, 레바논, 터키에서도 각각 상당 숫자가 프랑스에 흘러들었다. 프랑스의 유대인은 전쟁 전 수준의 2배 가까운 67만명 이상에 도달하여 세계에서 네 번째로 유대인이 많은 나라가 되었다. 이어서 영국의 유대인 실상을 적시하여 본다. 영국 사회가 ‘유대인의 정체성’ 논란에 휩싸였다는 뉴스가 주목을 끈다. 2009년 10월 30일, 영국 대법원은 모든 심리를 마치고 최종판결을 앞두고 있다. 런던의 한 유대인 학교가 12살 유대인 소년의 입학을 거부하면서 시작된 법정 다툼이다. 1732년에 세워진 런던의 유대인 프리스쿨(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학교)은 ‘엠’(M)이란 이름으로만 공개된 유대인 소년의 어머니가 다른 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소년의 입학을 거부했다. 영국 히브리연합의 최고 랍비인 조나단 색스가 정의하는 ‘정통 유대인’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들었다.
소년의 부모는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가 “학교 쪽의 요구는 인종법에 어긋나는 민족 검증에 해당한다.”며 1심 판결을 뒤집자, 이번엔 학교가 대법원에 상고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생각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유대 정통파인 ‘로렌 레진데이비스’는 영국 BBC 방송에서 “항소심 판결은 유구한 세월의 유대인 전통을 침해했다.”며 “누구든 그것을 송두리째 바꾸라고 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1290년 유대인 추방이 시작된 이후 1656년까지 거의 400년에 걸쳐 영국 땅엔 유대인이 살지 않았다. 여기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 대영제국의 총리자리에 오른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이다. 천대받던 신분의 유대인 디즈레일리는 영국 역사상 유대인으론 최초로 두 차례나 총리 자리에 올랐고 아울러 폐쇄적인 영국 귀족사회의 일원이 됐다. 그리고 그 시대 세계 판도를 주도한 영국 제국주의를 선도해 국력의 최대 융성기를 이끌었다.
유대인은 당시 유럽사회의 하층계급에 속했으므로 상류사회 진출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부친은 13세가 되던 해 디즈레일리를 성공회로 개종시켰다. 디즈레일리는 1832년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러다 1837년 토리당(현 보수당)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디즈레일리는 1846년을 시작으로 세 차례 재무장관직을 맡았으며, 1860년 드디어 대영제국 총리 자리에 올랐다. 당대 라이벌이며 자유무역주의자인 ‘윌리엄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과는 재무장관과 총리 자리를 서로 주고받았다. 디즈레일리는 1870년대 영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자 강력한 제국의 통합을 토리당의 제1정강으로 내세워 1874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그는 총리 자리에 복귀해 6년을 재임했다. 다음은 독일이다. 금융 분야에서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던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수는 1933년의 2만6158명에서 1970년대에는 4350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1920년대 17만5천명의 유대인이 살면서 세계 문화의 척도라고 할 정도의 활약을 보여 준 베를린에서, 1970년대 유대인의 숫자는 서베를린에 겨우 5,500명, 동베를린에 850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 폴란드는 유대인구의 부침이 가장 심했던 국가이다. 전쟁 전의 유대인 인구 330만 명이 1980년대까지 5000명으로 가라앉았다. 1939년에는 6만 명이었던 라디노어(Ladino語)를 사용하는 그리스 북동부 마케도니아의 항구 도시인 살로니카(Salonika, 그리스 이름은 테살로니카)의 유대인은 1980년대가 되자 겨우 1500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 아마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창조력이 풍부하다고 할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은 전쟁 전의 20만명에서 8000명으로까지 줄었고, 1949년에는 빈의 되블링 공동묘지(Döblinger Friedhof)에 매장되어 있던 헤르츨(Theodor Herzl, 시온주의 주창자)의 유해까지도 재매장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이송되어 갔다. 1930년대 7만 가까이를 헤아리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인구는 40년 후에는 1만2000명 정도로 그 세가 현저히 위축되었다. 앤트워프(Antwerp)를 서유럽의 다이아몬드 거점으로 키워 놓은 그곳 유대인 숫자는 제2차 세계대전 전쟁 전의 5만5천명에서 1980년대에는 1만3500명으로까지 줄었다. <브레이크뉴스> 전북판에도 실렸습니다. <저작권자 ⓒ 국제기독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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