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코 밑에 있는 멕시코는 미국의 뒷마당이며,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는 편의와 복종의 관계라는 데 별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나프타)으로 맺어진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는 ‘주말연인의 관계’를 벗어나지 않는 ‘편의상의 결혼’과 같은 것이다” 위에 인용한 두 문구는 ‘바른 말 잘 하다’ 해고된 멕시코의 전 유엔대사 아돌포 아길라르가 한 말이다. 아길라르는 미국의 이라크침략을 맹공격함으로 미국의‘눈에 가시’ 와 같은 인물로 결국 관직에서 쫓겨났다. 아길라르의 이야기는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 이다.
# 멕시코 식민통치 300년 스페인은 1521년에 멕시코에서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초급의 속도로 영토를 확장했다. 스페인은 멕시코 남쪽의 유카탄반도를 기점으로 하여 멕시코 본토와 북쪽으로 진격하여 현재의 미국의 텍사스,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애리조나와 네바다 그리고 유타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여 남미(latin america)에서 제일 크고 제일 넓은 땅을 소유한 대국으로써 식민통치를 하면서 300년 역사를 과시하고 있었다. 멕시코 원주민의 역사와 스페인의 멕시코 식민통치의 역사를 간략하게 되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3,500년경부터 알라스카 베링 해협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을 때 아시아의 몽골족이 멕시코에 정착하여 옥수수 농사와 조상숭배 제사를 행하는 ‘고전기 문명시대’를 열어 놓았다. 오늘의 멕시코 원주민들이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때부터 전해 내려 오고 있는 인디오의 전통이라고 여겨진다. 올맥문명시대(기원전 1200-900), 마야문명시대(기원후 250-900)를 지나 그 후에 멕시코 전역에 원주민 왕국들이 이곳저곳에 다양하게 건설되어 저들끼리의 태평시대를 대대손손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1521년에 에스파냐 탐험대의 H코르테스를 선두로 한 무장한 침입자들이 멕시코를 정복하였다. 도끼와 활을 가지고 있는 원주민들은 화약으로 총과 대포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무법자 침입군들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 후부터 300년 동안의 난폭한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을 통치하기위하여 무자비하게 살육, 강탈과 함께 노예노동을 강요했다. 식민통치자들은 자기들의 말을 고분고분히 잘 듣지 않는 인디언들을 마구 살해했다. 그때 흘린 인디언들의 피는 강이 될 정도로 엄청난 살육의 역사였다. 1535년에 에스파냐 국왕은 ‘부왕’을 멕시코에 파송했는데 ‘부왕’은 막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왕권의 대행자였다. 에스파냐 식민통치 300년 동안에 멕시코의 민중들의 구성은 4개의 부류로 되고 있었다. 첫째, ‘물라토’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족이었고, 둘째, ‘메스티소’는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족이었고, 셋째, ‘크리오요’는 백인혈통을 이어 받은 혼혈되지 않은 순종 백인들이었고, 그리고 넷째, ‘피온’은 원주민 혈통을 이어 받은 혼혈되지 않은 순종 인디오들이었다. 이런 부류는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유사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부왕의 통치가 오래 계속되는 동안에 부왕의 왕권은 날로 쇠약해 졌으며 민중의 4개의 부류들의 부류간의 불화와 갈등은 극에 이르고 있었다. 이중에 ‘크리오요’의 부류에 속하는 백인들이 모든 면에서 주권행사를 하고 있었다. 스페인으로부터 멕시코가 독립을 쟁취할 때 앞장선 것도 ‘크리오요’들 이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동향이었는데, 불란서와 스페인의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승리는 결정적이었다. 불란서와의 전쟁에서 스페인의 패전은 길고 긴 300년 동안의 식민통치의 종말을 예고하는 징표로 작용하고 있었다. 멕시코 원주민들의 자랑스러운 고대문명의 터 위에 스페인 침입자들은 십자가를 세워 놓고 300년 동안 잔인한 식민통치를 했다. 그러나 스페인 침략자들은 역사적 변천에 따라 드디어 막을 내리고 멕시코를 떠나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 독립과 미국-멕시코 전쟁 1823년에 멕시코는 독립국으로 창설되었고 빅또리아 장군이 ‘미국의 헌법’과 ‘스페인의 헌법’을 혼합하여 새 헌법을 제정하고 자기 자신이 5년 단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을 했다. 멕시코 공화국이 창설되고 대통령이 취임하기는 했지만 멕시코는 창설된 그 다음 날부터 내란으로 인하여 나라는 혼란의 극에 달하고 있었다. 내란의 원인은 ‘보수파’와 ’자유주의파’의 대립이었는데 제멋대로 정권을 탈취하고 저들의 기분에 떠라 정책을 바꿔서 정국을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이었다. 독립 후 불과 10여년동안에 대통령이 네 번이나 바뀌는 혼란이 계속 되었다. 보수주의자 a. l. 산타 아나 장군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쟁취했는데 그는 강력한 보수주의자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무능한 대통령이었다. 그가 집권하는 기간에 멕시코는 국토의 2/3를 미국에게 빼앗기는 비운에 처했다. 1836년에 석유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는 텍사스에 살고 있는 멕시코 국적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은 미국의 사주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멕시코로부터 텍사스의 분리를 선주장했다. 멕시코 정부는 텍사스 백인들의 분리 선주장을 용납할 수 없음으로 수비대를 동원하여 텍사스 알라모 요새를 공격했다. 하지만 오히려 수비대는 전멸하고 말았다. 텍사스에 살고 있는 멕시코 백인들이 멕시코 정부를 향하여 반기를 들고 분리를 주장하게 된 근본적이며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나? 미국의 사주도 물론 큰 이유이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노예문제’ 때문이었다. 텍사스의 백인 대지주들은 광활하고 넓은 땅에 농사를 짓기 위하여 무진장한 노예들이 필요했다. 필요한 노예를 확보하려는 백인들의 요구에 대하여 제동을 거는 것은 멕시코 정부였다. 멕시코 정부는 그때 오히려 노예해방을 위한 방향으로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텍사스의 백인 지주들은 멕시코 정부의 이런 동향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미국의 사주도 한몫했다. 반란을 일으켜서 승리한 백인들은 곧 텍사스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1836년에 미국은 곧 바로 텍사스의 독립을 승인했다. 그 후부터 만일 멕시코 군대가 텍사스를 공격하면 그것은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고 미국은 호통으로 협박했다. 미국은 1836년에 텍사스의 독립을 승인하고 그 후 1854년에 텍사스를 미국의 28번째 주 (state)로 병합시켜 자기 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와 같은 이웃 나라의 땅을 빼앗는 미국의 수법은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기 위하여 파나마를 콜롬비아에서 분리시켜 독립하도록 음모를 꾸민 수법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하여 일본을 내세워 ‘가쯔라-테프트 밀약’ 을 맺은 역사도 가지고 있다. 그 당시 미국은 어떤 나라였나? 미국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한 때보다 30년이나 먼저 북미에서 영국인들을 선두로 하여 식민지 점령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은 1776년에 멕시코보다 47년 먼저 북미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미국은 독립을 먼저 선포하기는 했지만 뉴잉글랜드와 뉴욕 그리고 남쪽으로 버지니아 근방 등 불과 13주(state)를 기본으로 초대 대통령 워싱턴을 중심으로 독립했다. 독립을 쟁취한 미국의 영토는 불과 13개 주 뿐이며 멕시코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소규모의 영토였다. 그러므로 미국은 독립 초창기부터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에 불탔다. 영토확장과 자원확보를 위한 미국의 욕심은 끝이 없이 계속되었다. 1844년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제임스 폴크 대통령은 텍사스를 강탈한 데 만족하지 않고 멕시코에 속해 있는 무진장하고 광활한 땅을 닥치는 대로 탈취할 흉계를 꾸몄다. 결국 미국의 폴크 대통령은 <멕시코 전쟁>을 일으켰다. 그것은 곧 멕시코 땅을 빼앗을 목적이라는 것은 공개된 비밀일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1847년 8월에 미국은 의도적으로 멕시코 국경을 침범하여 국경 분쟁을 유발시켰고, 스코트 장군의 지휘로 1만2천명의 미해병대가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를 공격하여 강점하기에 이르렀다. 보수주의자인 싼타 안나 멕시코 대통령은 전쟁포로로 붙잡히는 수모를 당하면서 완전한 참패로 미국에 항복했다. 패전한 멕시코는 미국의 강압에 못이겨 <과달루베 – 이달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조약에 의하여 멕시코는 이미 빼앗긴 텍사스를 포함하여, 캘리포니아, 네바다, 뉴멕시코, 애리조나, 유타 그리고 콜로라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단돈 1천5백만 달러의 헐값으로 미국에 팔아 넘겨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멕시코는 전쟁 배상금으로 오히려 325만 달러를 미국에게 지불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다.
<과달루베-이달고 평화조약> <과달루베-이달고 평화조약>에 의하여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국경이 정해졌는데 현재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국경선인 리오그란데강은 바로 그 때에 정해졌던 국경선이다. 국토의 2/3를 미국에게 빼앗긴 산따 안나 대통령은 멕시코의 민중봉기에 의하여 추방되어1855년에 미국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산따 안나 대통령을 추방한 후에 멕시코의 보수파와 자유파는 서로 정권을 잡기위하여 물고 뜯으며 3년동안 내전을 벌였다. 그 결과 3년 동안의 내전의 승리자는 자유파로 결판났다. 자유파 베니또 후아레스는 1861년에 대통령에 취임하여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후아레스 대통령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광활한 토지와 성직자와 군인이 소유하고 있는 부당한 특권들을 몰수하고 박탈했다. 후아레스 대통령은 교회와 신부들과 그리고 지주들과 결탁한 군인들이 멕시코의 개혁과 근대화 운동에 큰 장애물이 되고있다고 판단했다. 후아레스 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정책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게 된 보수세력과 천주교(catholic church)교회는 강하게 반발하였다. 교회에서 몰수한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해 주었지만 농민들은 감당할 재력이 없기 때문에 다시 자본가들의 손으로 넘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후아레스 대통령의 강력한 개혁운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교회와 지주들과 군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0여년 후에 막을 내렸다. 1876년에 새로 집권한 쁘로파라오 디아스 대통령은 극우보수주의자이며 전형적인 독재자 였다. 그는 외국자본을 무분별하게 끌어 들여와 멕시코의 토지 1/5을 외국인의 소유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빠른 경제성장을 역설하며 선전했지만 대부분의 상업과 공업이 외국인의 손으로 운영되었으며 멕시코의 경제는 순전히 미국의 ‘당근과 채찍’에 의하여 좌우되는 종속적 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멕시코의 철도와 석유와 광산은 95%가 외국인의 소유가 되었다. ‘멕시코는 외국인에게는 어머니이고 멕시코인에게는 계모이다’는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친미주의적 대통령이었다. 디아스 대통령은 8회에 걸쳐 대통령에 재선되면서 35년동안 무서운 독재를 하다가 1911년에 권좌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디아스 대통령의 35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은 교회와 미국을 비롯한 외국자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디아스 대통령의 정치는 미국문화 숭배와 민족문화를 멸시하는 입장과 자세였다. 그래서 멕시코 민중들은 “재선반대 재선반대”를 유일한 구호로 외치며 친미사대주의에 빠진 디아스를 규탄했다. 바로 이 구호를 외치면 투쟁한 민중들때문에 멕시코의 다음 세대에 전개된 “멕시코 혁명”이 가능했던 것으로 분석된다.<계속> <저작권자 ⓒ 국제기독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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