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하면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십자군이라는 말은 고귀한 목적이나 정의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인식하고 있다. 미국 해병대 항공단 뷰포튼 전투비행대는 1959년부터 2008년까지 50년 동안이나 “십자군”이라는 명칭을 부대의 명칭으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이 부대는 이라크전 파병을 앞두고 중동국가들에게 자극이 될 수 있다는 염려 대문에 “십자군”이라는 부대의 명칭을 철회하고 본래의 명칭인 “늑대부대”로 개칭했다.
역사영화 장르의 거장인 리들리 스콧은 십자군전쟁을 소재로 하여 영화 <Kingdom of Heaven>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십자군전쟁의 허위와 죄악상에 대한 생생한 재현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는 유명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더욱 더 충실하다는 점에서 호감을 주고 있다. 정말 십자군은 성스러운 정의의 군대였을까? 중세기의 십자군은 과연 신의 계시를 받고 장장 186년(1095-1291) 동안이나 전쟁을 수행했을까? 절대로 그렇치 않다는 것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 영화를 감상하면 우리들 자신이 그동안 기독교 역사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전쟁의 또 다른 당사자인 이슬람사람들은 십자군전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도 서구의 기독교에 의하여 철저히 세뇌된 피선교국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군전쟁에 대하여 지금까지 한쪽만을 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라도 제3세계의 눈으로 중세기 십자군전쟁의 역사를 다시 고찰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십자군창설의 기원 로마 제국이 AD 476년에 동서로 분열되었다. 동서로 분열된 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의 “비잔틴제국”, 이렇게 두 개의 제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교회만은 1054년까지 분열되지 않고 있었으며 동로마제국의 비잔틴교회는 여전히 명목상으로 그대로 서로마 카톨릭교황청의 전통과 통치하에 남아 있었다.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서로마제국의 내부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로마의 세속정권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그때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 교황인 우르바누스 2세 사이에 정치와 교권의 관계의 불화로 인하여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권위가 로마에서 뿐만 아니라 서유럽전역에서 실추되고 있었다.
다급해진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는 로마 카톨릭교황청 우르바누스 2세 교황에게 긴급한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동방의 비잔틴 기독교제국으로부터 긴급한 군대의 지원의 요청을 받은 로마교황청의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로마와 서유럽에서 실추되고 있는 교황청과 교황의 권위와 위신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이 생각해 낸 것은 다음 세가지였다. 첫째, 로마 카톨릭교회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황제들과 군주들 사이에서 점점 약화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십자군전쟁을 고안해낸 것이었다. 둘째, 로마 카톨릭교회의 내부적 단결을 보다 더 공고히 하기 위하여 교회의 숙원인 예루살렘 성지회복의 명분으로 십자군전쟁을 주장함으로서 교회 내부에서 교황권의 신장을 노리고 있었다. 셋째, 로마 카톨릭교회가 내적으로 동서로 분열되어 있는 역사적 현실을 감안하여 십자군전쟁을 일으킴으로서 흡수통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으려 했다. 이슬람의 침공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는 동로마제국을 원조한다는 명분으로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십자군창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그의 고향이 프랑스이기 때문에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었다. 그는 1095년 11월에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긴급종교회의를 소집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이 종교회의를 긴급히 소집한 목적은 오직 십자군을 창설하기 위함이었다. 클레르몽 종교회의에 유럽전역에서 300명의 주요 성직자들이 모였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연설을 통하여 이슬람의 위협을 받고 있는 동로마 비잔틴제국과 비잔틴교회를 신흥 이교도 이슬람의 위협에서부터 구출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교도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되찾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열띤 선언에 성직자들과 군중들은 “신의 뜻대로, God wills it”을 외치면서 열광적으로 화답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그가 프랑스 출신 교황인 것을 과시하여 프랑스 전역을 몸소 순회 하면서 십자군창설과 십자군에 동참할 것을 선동했다. 교황이 몸소 직접 돌아다니면서 십자군창설의 시급함을 선동함으로서 예상치 못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십자군창설 선동은 성공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뿐만 아니라 서유럽전역에서 유명, 무명의 기사들이 대거 참가했으며 농민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십자군에 지원을 했다. 하지만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십자군창설 선동에 호응을 한 것은 유럽의 황제들, 왕, 또는 지방의 봉건 제후들이 모두 다 호응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십자군창설에 열광적으로 호응한 사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부류에 속한 군중들이었다. -부모로부터 토지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는 봉건 귀족의 차남 기사들에게 있어서 십자군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매력적이었다. 막대한 전리품이 그들의 눈앞에서 어른거렸을 것이며 특히 이슬람의 땅을 점령하고 또 성지를 탈환하면 전리품으로 땅을 소유하게 된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가난한 농부들과 빈곤한 민중들이 그들의 무지함이 십자군에 지원하는 동기가 되고 있었다. 그들은 신의 가호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순진한 마음으로 군중심리에 이끌리어 십자군에 동원되고 있었다. -십자군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이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 “신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사명감에 의하여 십자군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사명의식을 가진 무리들이 유럽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십자군으로 나아가 싸우기만 하면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권”을 받을 수 있었다. 교황이 발행하는 “면죄권”을 받기만하면 이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를 받게 돼 죽어서도 “천국행”이 보장된다고 하는 중세기 기독인들의 공통된 신앙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당시 로마교황청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면죄권”을 발행하여 민중들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약화된 교황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십자군을 창설했는데 그 결과는 엉뚱하게 다른 방향에서 큰 호응을 획득했던 것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이교도들로부터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성전이라고 모두 다 주장했다. 십자군에 동원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오합지졸의 무리였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오합지졸의 무리들은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이 어느 방향에 있는 것인지 조차도 전혀 모르는 무리들이었다. 인간의 욕망과 무지가 뒤엉켜져 만들어 낸 장대한 드라마가 빛과 어둠속에서 명멸하는 인간들의 군상의 스토리로 연출되고 있었다. 이 스토리가 바로 십자군을 창설한 역사인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해야만 할 성스러운 이유는 없는 것이다.
십자군전쟁은 어떻게 전개됐나? 십자군전쟁의 선발대 역할로 1096년에 제일 먼저 출전한 광대한 집단이 있었다. 이 집단의 명칭을 “군중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군중 십자군”의 지도자는 은자 피에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로마 카톨릭교의 광신자였다. 은자 피에르는 “나는 예루살렘을 탈환하라는 베드로의 계시를 받았다”라고 주장했는데,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은 교묘하게 이 미치광이 광신자의 주장을 이용하면서 12,000명의 “군중 십자군” 모집과 출동을 허락했다. 하지만 이 12,000명의 “군중 십자군”은 광신자인 은자 피에르를 중심으로 하는, 순수한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을 뿐 비이성적이면서 무일푼인 무리들이었다. 아무 준비와 계획도 없이 무조건 성지를 향하여 출발한 “군중 십자군”은 예루살렘이 있는 방향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서 닥치는 대로 약탈행위만 일삼고 있다가 1년 안에 모두 다 패망하고 말았다. 방향감각도 없이 무작정 출발한 “군중 십자군”은 독일에서 유태인을 학살하고 약탈했다. 그러다가 헝가리에 이르러서 헝가리기병대의 습격을 받아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겨우 살아남은 “군중 십자군”은 가는 곳마다 약탈행위를 계속하면서 드디어 동방 비잔틴제국의 영토 안으로 진입했다. 그때 당시 동방 비잔틴제국의 알렉시오스 황제는 “군중 십자군”의 약탈행위를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군중 십자군”을 전부 배에 태워 이슬람 영토에 데려다 주었다. 그곳에서 이슬람과 싸우라고 하는 뜻으로 비잔틴에서 떠밀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군중 십자군”은 이슬람영토에 들어가 그곳에서도 약탈행위만 계속하다가 결국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십자군전쟁을 최초에 시작한 “군중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성전이라는 명분과는 아무 관계 없이 1년 동안 허무하게 방황하다가 12,000명이 모두 다 전멸을 당하는 비극적인 역사적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 후에 십자군전쟁은 제1차 십자군전쟁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 제9차 십자군전쟁까지 186년(1096년-1291년) 동안이나 계속 됐다. 지면상 제한으로 제9차 십자군전쟁까지의 길고 긴 전쟁사를 자세히 기록할 수 없음으로 9차전쟁까지의 중요한 요점만을 간추려서 살펴본다.
제1차 십자군원정(1096-1099년) 그때 당시 이슬람의 통치권 정세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패망에 이르고 있었으며 또 페르시아에서는 셀주크 제국이 내부분열로 인하여 갈갈이 찢겨짐으로서 파산에 이르고 있는 위기의 시점에 처해 있었다. 십자군원정은 이 틈새를 이용하여 블로뉴 백작 가문의 차남인 고드프루아가 최초로 예루살렘 성벽을 넘어 승리했다.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 왕국을 세워 최초로 예루살렘의 왕이 됐다. 제1차 십자군원정대는 주로 프랑크인들이었는데 그들의 잔악한 행위는 이교도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여 그리스도교적이 아닌 만행을 저질렀다.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식인”을 자행했다고 하는 당시의 프랑크 십자군의 잔인한 만행과 비인륜적인 악행에 대하여 역사는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십자군전쟁의 악순환은 처음부터 시작됐으며 유럽인의 이성적 자제력은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신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약탈과 생존의 본능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있는 십자군이었다. 제2차 십자군원정(1147-1148년) 당분간 십자군의 점령군과 무슬림이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슬람측의 반격이 강화되면서 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로마교황 베르나르도의 호소로 또 다시 제2차 십자군이 조성됐다. 프랑스의 황제 루이 7세와 독일의 황제 콘라드 3세를 중심으로 많은 십자군들이 모집됐다. 하지만 새로 모집된 십자군들은 전체적으로 정국을 회복하는데 실패하고 소아시아와 예루살렘 주변 등 여러 지역에서 고전을 하다가 결국 이슬람군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제3차 십자군원정(1189-1192년) 1187년에 예루살렘이 또 다시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다. 교황 그레고리오 8세가 예루살렘 재탈환을 하자고 호소하여 프랑스의 프리드리히 황제가 직접 통솔하는 강력한 십자군이 재조직되어 혁혁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황제가 도하 작전에서 물에 빠져 전사함으로 십자군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그 후에 영국의 왕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립 2세가 연합하여 예루살렘 재탈환을 시도했다. 이들은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했지만 십자군이 성지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고 술탄과 화해정책을 펴서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를 주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리들리 스콧이 제작한 십자군에 대한 영화인 <Kingdom of Heaven>은 바로 이 제3차 십자군전쟁 당시의 복잡한 상황들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제4차 십자군원정(1202-120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제4차 십자군원정은 예루살렘이 아닌 그때 당시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의 목표로 삼았다. 십자군은 이집트로 가기 위해 베네치아공화국에 선박 운반의 도움을 요청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어떤 나라인가?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태리 북쪽에 있는 작은 나라인데 그때 당시 선박운항으로 유명한 나라였다. 십자군은 베네치아 선박의 도움을 요청하여 합의를 받았다. 하지만 베네치아공화국은 살라딘과 밀약을 맺고 십자군에게 엉뚱한 요구를 했다. 그 엉뚱한 요구는 십자군이 먼저 헝가리왕국의 “자다르 항구”를 우선 공격하면 그 대가로 선박운항을 지원해 십자군을 이집트로 가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다르 항구”는 원래 베네치아공화국의 항구였는데 헝가리왕국에 빼았겼던 것이었다. 베네치아공화국은 십자군을 이용하여 헝가리에게 복수할 것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베네치아공화국의 속임수에 빠진 십자군은 자르다 항구를 공격하고 그 곳에서 약탈을 감행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십자군의 공격을 받은 자르다 항구도시는 기독교국인 헝가리의 영토가 됐으며 또 헝가리의 영토가 된 후에 로마 카톨릭교황청에 충성을 바치는 유명한 항구도시였다. 사실 자르다 항구는 로마교황청의 보물이었다. 그런데 로마교황청의 보물인 자르다 항구를 십자군이 공격하고 약탈을 감행했던 것이다. 십자군이 자르다 항구도시를 공격하고 약탈의 맛을 보았다. 하지만 뜻밖에 십자군은 교황의 징계를 받음으로서 십자군행로에 있어서 막장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후부터 십자군은 이제 보다 더 큰 죄악에 가득찬 행동들을 저지르고 있었다. 십자군은 본래의 이집트행을 완전히 포기하고 동방으로 이동하면서 방황을 계속하다 동방 비잔틴제국의 영토에 이르렀다. 그때 당시 동방 비잔틴제국은 황제의 계승문제로 분열되어 삼촌에게 쫓겨난 황태자 알렉시오스가 삼촌인 황제에 대항하여 게릴라전투를 하고 있었다. 황태자 알렉시오스는 십자군을 매수하여 용병으로 사용했다. 돈과 약탈에 이미 눈이 먼 타락한 십자군은 막대한 보상을 받고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일단 승리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콘스탄티노플은 얼마 후에 다시 원상복귀되었다. 어쨌든 제4차 십자군원정은 십자군원정이 아니라 악마의 행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리스 동방교회는 십자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본 것은 오로지 지옥의 본보기와 암흑세계의 소행을 보았을 뿐이다.” 제5차 십자군원정(1217-1221년) 제5차 십자군원정은 1215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라테란 공의회에서 결의함으로 성사됐다. 하지만 실제로 라테란 공의회 2년 후인 1217년에야 제5차 십자군원정이 실시됐다. 그런데 그때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로마제국의 황제로 프리드리히를 조건부로 임명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조건부는 무엇이었는가? 프리드리히가 로마의 황제로 임명되는 조건으로 십자군을 창설하고 동원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하지만 로마의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동원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음으로서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십자군원정은 주로 동유럽의 신흥기독교국들의 약소한 병력으로 제5차 십자군원정을 시도하여 이집트 공격을 했으나 아무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한편 같은 시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에루살렘 성지 탈환은 무력으로 할 것이 아니라 복음정신으로,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비무장상태로 적국의 술탄을 직접 만나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술탄은 프란치스코를 너그럽게 대우하여 풀어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운동은 성지에서 시작되어 그때 당시 계속되고 있었다.
제6차 십자군원정(1228-1240년) 제6차 십자군원정은 기이한 현상으로 시작됐다.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로부터 십자군파병을 조건부로 황제에 임명된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파병을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서 1215년에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았던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았던 프리드리히 2세는 1228년에 파문된 그 상태 그대로 있으면서 십자군을 일으켰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을 일으키고 있을 당시 술탄의 알 카밀은 내란을 겪고 있는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2세는 그 틈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술탄의 알 카멜과 협약을 맺고 예루살렘 통치권을 이양 받는데 성공하였으며 1239년까지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239년에 이슬람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장악했다. 1239-1240년에 프랑스 제후들이 예루살렘 원정에 출전 했지만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제7차 십자군원정(1248-1252년) 1248년에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오랫동안 십자군원정을 준비해 오다가 우선 이집트를 공격하고 후에 성지탈환을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듬해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루이 9세는 카이로를 향하여 가는 길목에서 이집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1250년에 패전하고 그 자신도 포로가 되었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내고 풀려났다. 루이 9세는 1254년까지 이집트에 머물면서 몽골과의 동맹을 맺고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으나 결국 모두 다 실패했다. 제8, 9차 십지군 원정(1252-1291년) 루이 9세는 재차 출병하여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했다. 이 때 루이 9세의 동생이며 시칠리아의 왕인 샤를이 형을 도와 출병했다. 하지만 루이 9세는 1279년에 튀니스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동생 샤를 왕은 그 후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연합하여 이라크에 머물면서 십자군원정을 계속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드디어 십자군원정은 여기서 186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십자군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사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나? 역사에 대하여 너무 거창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된다. 인생에서 오직 “사실”만이 중요한 것처럼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오직 “사실”만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또한 역사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무조건 “도덕주의화”를 강요하여 올바른 역사전달의 임무를 망각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모독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신학교 학창시절, 서양사와 교회사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필자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서양사와 교회사의 여러 가지 책들 속에는 학창시절 교실에서 배운 내용들이 전혀 들어 있지 않는데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 역사에 대한 “도덕주의화”가 혼돈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무조건 “미화” 하거나 또는 역사 평가를 “아전인수”처럼 자기의 생각과 일치하도록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중세기의 십자군전쟁은 1차에서 9차까지 186년 동안이나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탈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군전쟁은 분명히 실패한 전쟁이었다.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한 교황의 권위의 몰락처럼 중세기 카톨릭교회의 권위도 땅에 추락했다. 십자군전쟁을 “중세기판 중동전쟁”이었다고 해석한다. 지금 미국을 비롯하여 서구열강들이 벌이고 있는 중동전쟁은 제3세계의 눈으로 보면 분명 “현대판 십자군전쟁”이라 할 수 있다. AD 1096년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광신자인 은자 피에르느 “군중십자군”을 창설하면서 “나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라는 베드로의 계시를 받았다”라는 허황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와 꼭 같은 사건이 1899년 8월 14일 미국에서 발생했다. 그때 당시 미국의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미국이 필리핀을 침략할 것을 명령하면서 “나는 신으로부터 필리핀을 기독교 국으로 만들라는 계시를 받았다”라고 하는 허황된 소리를 했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계시에 따라 미국의 11,000명의 지상군이 필리핀을 점령했으며 필리핀인 60만 명이 학살을 당했다. 미국군 11,000만 지상군을 필리핀을 기독교 우방국으로 만들기 위한 “미국의 십자군”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한국의 국군부대에서는 196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군부대의 연례행사로 이른바 “기독교 집단세례식”을 거행하고 있다. 국군부대의 넓은 광장에 수천, 수만 명을 모아놓고 한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목사들 수십 명을 단체로 초청하여 이른바 “집단세례식”을 해마다 거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한인교회의 보수주의 계통 교회의 목회자들이 자랑스럽게도 한국 국군부대에 초청을 받고 국군의 “집단세례식” 행사에 참가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문제는 군부대에서 집단으로 세례식을 거행하면서 세례를 받은 군인들을 향하여 민족을 위한 “한국의 십자군”들이라고 함부로 명칭을 부여하고 있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중세기의 십자군전쟁에 대한 “손익계산서”조차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된다. 십자군전쟁이 신앙보다 오히려 권력과 돈을 더 중요시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에 관심조차 갖지 않는 한국 기독교계가 안타까운 이유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국제기독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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