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북부산지족 선교사로 21년'권영수'

털이 부숭부숭 삶은 멧돼지, 툭툭 털어내니 '구더기'가 우수수~

추광규 | 기사입력 2011/06/22 [05:36]

필리핀 북부산지족 선교사로 21년'권영수'

털이 부숭부숭 삶은 멧돼지, 툭툭 털어내니 '구더기'가 우수수~

추광규 | 입력 : 2011/06/22 [05:36]
필리핀에서도 오지중의 오지인 비키칸(Bekigan). 비키칸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필리핀 마닐라 북서쪽으로 250km 떨어진 루손 섬 벵게트주의 바기오(Baguio)시에서 버스로 9시간 가량 걸리는 본톡(Bontoc)으로 가야만 한다. 이곳에서 지프니로 갈아타고 3시간을 가야만 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이곳에서도 사역을 펼치고 있는 산지 부족마을 까지는 2시간 이상을 걸어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란다.
 
열 몇 시간 만에 미국 본토까지도 갈 수 있을 만큼 교통이 발달한 현대 문명 사회에서 아직도 이렇게 머나먼 여정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생소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 같은 오지에서도 하나님의 사역을 21년째 담당하고 있는 선교사가 있다.
 
▲ 비키칸 산지족 마을     © 구글검색


권영수 선교사(59세). 그는 많고 많은 지역 중 어떻게 해서 필리핀 비키칸에서 선교사역을 펼치고 있을까? 또 그의 지난 21년간의 사역을 통한 부흥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 지고 있을까. 이와 관련 그의 선교의 역사는 놀랍기만 하다.  
 
64개의 현지 교회를 설립 했는가 하면 2,500여명의 재학생이 선교 사역을 배우는 '킹스칼리지'와 1,500여명의 재학하는 '루손 동부대학'을 설립해 필리핀 선교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22일, 10여일전 한국에 들어와 필리핀 현지 선교 상황을 전하고 있다는 권영수 선교사를 만나 그가 감당해 왔던 필리핀 선교에 대해 들어보았다.
 
-필리핀 선교 사역지중 오지라고 하는 비키칸 지역에서의 선교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요.
"1989년 12월 유니세계선교회와 울산 '우정교회'가 저희 부부를 필리핀 선교사로 파송했었습니다. 그때는 잠깐 동안의 방문이었고 정식 파송된 것은 1991년 5월 이었습니다. 당시 첫 선교 사역지는 '바기오'시에서 약 40분 거리의 '사블란'이라는 지역이었습니다.
 
▲ 지난 5월 22일  필리핀 선교를 주제로 설교하는 권영수 선교사     © 추광규
그곳에서 교회가 건축되고 있었는데 그 교회를 관리하는 일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시 그곳에서 원주민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너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교회를 건축할 때는 모든 성도들이 합심으로 기도하고 물질을 모으는 등 보통 정성들이 아닌데, 이곳 원주민들은 성전을 지어도 감격이 없고 기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한국교회의 피눈물 나는 헌금으로 지어진 교회가 훗날 쓸모없는 창고로 변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 참으로 실망스럽고 염려스러워 이를 한국에 보고하고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데 '예수전도단'출신인 로이드와 토니가 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선교사님 진정으로 복음이 필요한 곳을 가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해 '그런 곳도 있습니까"라고 되묻자 이들은 자신들을 따라 오라고 말한 것이 필리핀 산지족 사역에 눈을 뜨게 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저를 인도한 곳이 바로 비키칸 부족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비키칸 지역에 대해 설명을 해주십시오.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열대지방입니다. 때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덥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제가 있는 산지는 2천 내지 2천5백 미터 고지이기 때문에 오후 3시쯤에는 구름이 그 지역 부족마을을 덮으면서 한국의 늦가을처럼 날씨가 차가워집니다. 비키칸 부족 마을에서 잠을 잘 때 초저녁에는 이불을 걷어차고 자다가도 새벽이 되어서는 다시 이불을 찾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비키칸은 필리핀 바기오 시에서 본톡으로 먼저 가야만 하는데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침 5시 7시 9시 세 차례의 버스가 그 전부였습니다. 본톡 까지는 버스로 9시간이 걸리는데 가는 길이 무척이나 험합니다. 버스에서 흔들리다 보면 내장에 피멍이 든다는 말이 그 정신없는 상황을 표현하기에 적당 할 정도 입니다.
 
버스는 높은 산을 굽이굽이 7부 또는 8부 능선 정도로 해서 가는데 차창 밖을 보면 천 길 낭떠러지 입니다. 옛날 비포장된 한계령을 상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길이 험한 만큼 많은 사망사고가 발생하곤 하기에 우기 철은 가급적 여행을 자제할 만큼 험한 곳입니다.
 
거기에 더해 계곡 길을 달리다 보면 강도들이 길을 막고 버스를 세워 손님들의 소지품을 털어 가는가 하면 신인민공산게릴라(N.P.A)의 활동으로 무차별 총격을 받은 사건들 또한 비일비재한 곳이기도 합니다.
 
본톡으로 이동한 후에는 지프니(Jeepney: 버스와 지프를 분해해 조립한 필리핀 특유의 자동차)로 사당가 부족마을로 이동한 후 여기서 부터는 도보로 2시간 남짓 걸어가야만 도달하는 곳이 바로 제가 사역하는 비키칸 지역이랍니다."
 
-선교 사역중 현지에서 겪었던 일을 말씀해 주십시요.
"필리핀 산지 족들에 있어 2월부터 6월 까지는 예전 우리네 보릿고개처럼 양식이 떨어지는 기간 입니다. 매우 척박한 지역이기에 이때는 먹을 것이 없어 아침에는 밥, 점심에는 고구마로 하루 두 끼에 그치는 게 전부 입니다. 이 같은 보릿고개에서는 그들과 함께 굶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나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느 집에서 산돼지를 잡았다며 저녁 식사 초대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산돼지 바비큐를 상상하는 제 이빨 사이로는 신 침이 꿀꺽꿀꺽 넘어갔더랬지요. 제가 가니까 조그만 집에는 벌써 많은 원주민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작은 초롱불 사이로 서로의 눈망울만이 더욱 반짝거리는 가운데 고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먹만 한 크기로 삶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돼지 고기가 소쿠리에 담겨져 들어왔습니다. 체면불구하고 가장 큼지막한 덩어리를 짚어든채 남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한입 정신없이 깨물었답니다.
 
그런데 고약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입니다. 산돼지 고기는 이미 썩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고기를 꿀꺽 삼킬 수가 없어 내뱉으려고 주변을 살펴보니 원주민들이 제 주위를 가득 메운 채 제가 어떻게 하는가를 살펴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순교하는 심정으로 그 썩은 고기를 씹어서 목구멍으로 간신히 넘겼지요. 이 썩은 고기 냄새로 인해 저의 내장은 뒤틀렸고 먹은 것이 전혀 없이 텅 빈 속이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겁니다.
 
이들이 이처럼 썩은 고기를 먹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때로 산속 깊은 곳에 들어가 노루나 산돼지를 잡아오곤 하는데 문제는 보관방법입니다. 전기와 냉장시설이 없다보니 그저 처마에 매달아 말리는 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고기냄새를 맡고 온갖 종류의 벌레와 똥파리 그리고 쉬파리가 몰려들게 되고 살속에 알을 까놓곤 합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구더기가 되어 살속 깊은 곳 까지 바글바글 하게 되는데 어떤 때는 구더기가 하도 많아 가만히 있어도 땅에 떨어질 정도 입니다. 하지만 이들 원주민들은 이렇게 말린 고기를 그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툴툴 털어낸 다음 털이 붙어 있는 채로 삶아서 가져왔던 것입니다."
 
-현지 선교사역중 생과 사의 경계를 숱하게 넘나들었다고 하는데요.
"예. 워낙 오지이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들이 계속되었답니다. 특히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중 하나는 태풍에 날려 갔던 일입니다. 아내와 저는 부족교회에서 전도부흥집회를 열고 신학교에서 강의를 마친 후 바기오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이미 큰 태풍이 필리핀 동해안을 강타하고 우리 선교지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우리는 강한 바람 속에서 버스를 타고 약 4시간 정도 달려 '아똑(Atok)'이라는 곳에서 멈추어 서게 되었습니다.
 
태풍으로 산사태가 나서 절벽이 무너져 내려 꼼짝달싹 못하게 된 것이지요. 버스 속에 갇혀 있는데 같이 동행했던 김현영 선교사가 '산사태로 산이 무너져 내렸지만 지금 소강상태에 있으니 지금 빨리 뛰어 건너면 넘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믿고 버스에서 내려 도로를 지나가는데 중간쯤 가고 있는데 갑자기 산 위에 있던 바위들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산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완전히 길은 없어지고 도로는 절벽 그 자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어 다시 버스로 돌아온 저희 부부는 하룻밤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버스 안이라고 해도 더는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도로는 어디 피할 수 있는 도로가 아니고 산 절벽을 깎아서 만든 도로 였기에 버스는 갈 곳 없는 외길에 서 있는 셈이 되었고 점점 강해지는 바람 때문에 산이 언제 또 다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필리핀 특유의 교통 수단인 '지프니'     © 구글검색
길이 꺼져 버리면 버스는 저 깊은 계곡 낭떠러지로 구를 수밖에 없었기에 그날 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공포 속에서 떨어야만 했습니다.
 
날은 밝았지만 태풍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또 하루를 버스에서 지내고 다음날이 되었지만 태풍의 기세는 여전 했습니다.
 
문제는 당시 제 몸무게는 48kg에 불과 할 정도로 여윌 대로 여위어 있었는데 뒷골이 차가워지면서 손발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이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다고 말 한 후 다른 승객들과 그곳에서 탈출을 시도했답니다.
 
버스에서 나오자 태풍속의 굵은 빗줄기는 마치 제 얼굴을 돌멩이로 치는 것 같이 강한 충격을 주었지만 저는 몸을 엎드린 채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움직여 나갔습니다. 아내는 몸을 바짝 엎드린 채 저보다 20미터 정도 앞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아내가 강한 태풍과 함께 마치 손수건처럼 날아가는 거였습니다. 저는 소리를 지르며 기다시피 하여 아내에게 다가갔습니다. 아내의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저 또한 태풍에 그대로 굴러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저희는 깊은 계곡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다행히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답니다.
 
당시 저는 이 같은 상황이 너무나 기가 막혀 하나님께 부르짖었지요. '하나님 이게 과연 선교입니까? 누구를 위한 선교입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죽어가야 합니까? 나를 파송한 한국교회가 이 사실을 압니까? 나의 친구들, 나의 동기들이 이 사실을 압니까?'라며 울부짖었던 거지요.
 
이때 태풍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래 너를 파송한 한국교회는 모른다. 너의 친구들, 너의 동기들은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다 아노라!' 저희 부부는 '주님이 다 아신다'는 응답하심에 다시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고 없어진 도로를 피해 다른 산 계곡을 여섯 시간 사투를 벌인 끝에 무사히 살아 돌아 올 수 있었답니다."
 

▲권영수 선교사와 사모님     © 추광규


-현지 부족 선교사역의 어려움과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해외 선교의 어려움중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는 것 입니다. 특히나 필리핀의 경우 공식 공영어는 영어라고 하지만 이들 산지족은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즉 각 부족마다 언어가 다르기에 이곳에서는 영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해결책으로 제가 생각했던 것은 현지 원주민들을 교육을 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고도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관련 저는 2004년 '이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지식을 심어주어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자. 도전 의식을 갖게 하고 창조적인 꿈으로 이 아이들을 키워 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대학 설립에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교사인 제가 대학을 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겠지만 오직 믿음으로 첫 삽을 뜨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되어 첫해에는 600명으로 시작하여 1000명 1200명 2400명 3000명....8년째인 올해에는 4000명이 입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한 가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실의 수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 입니다. 큰돈이 있어서 건물을 한 번에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분 사랑과 기도의 손길이 모여 지어지고 있는 터라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의 학비는 한 학기에 25만원씩 두 번 납부하고 학점은 일반 대학과 같은 140학점을 17개 학과 입니다. 2년제 기술학과는 6개학과로 학위과정은 11개 교실 한 칸씩 25칸이 더 필요합니다. 1칸에 1천여만 원이 들어갑니다. 앞으로도 많은 물질적 후원이 절실합니다."
 
-후배 해외 선교 사역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씀은
"선교는 가장 먼저 자기에 대한 포기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행복과 자기 편안함을 포기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의 희망마저 포기해야 합니다. 같은 선교사 끼리 경쟁의 상대가 아니고 동반의 관계입니다. 선교지에서 서로 협력하고 이해하고 질투의 벽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또 후배 선교사들이나 다른 선교사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선교지를 떠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의 진정한 성공은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박수갈채를 받으며 파송 받았던 선교지에서 결코 변하거나 흔들림 없이 또한 임의대로 선교지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파송 받은 선교지에서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때 마침내 성공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권영수 선교사 후원하기]
 
인터넷 전화 070-8227-9428 / 핸드폰 002-63-917-580-6152

국내 은행
국민은행 (권경환) 048-21-0414-481
우체국   (권형근) 012591-02-045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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