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 英 恩 素砂에서의 생활 소사신앙촌은 부천시 범박동 41번지에 있다. 부천시로 되기 전에는 부천군 소사읍이었다. 1958년에 신도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는데 2000세대가 넘는 집들이 6개월 만에 이루어졌다고 신도들은 두고 두고 자랑하였다. 모두 주님의 크신 은혜 덕분이라고 하였다. 매사에 치밀한 어머니는 믿기는 하면서도 이모처럼 광신은 아니었다. 공부는 공부고 믿음은 믿음이라면서 언니의 신앙촌 입주를 강력히 말렸고 나중에 신앙촌까지 따라가서 학교에 나갈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고집 센 언니는 듣지 않았다. 공부보다 주님사업이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팔자소관이니 할 수 없다며 풍기고등학교에 언니의 자퇴원을 내고 말았다. 나도 사람들이 들락거려 골부를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어머니에게 신앙촌에 보내 줄 것을 졸랐다. 이미 나에겐 신앙촌에 들어가는것이 하나의 소망처럼 되어버렸다. 신앙촌은 “꿈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동화의 나라로 상상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는 꼭 신앙촌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주위의 신도들은 이왕 믿으려면 믿음의 식구들이 모인 곳에 가서 믿어야 천년성에 갈수있지 사회인과 함께 살면 아무리 애를 써도 마귀에 씌여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어머니도 이왕 믿음의 길로 들어선 바에야 신앙촌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1962년 12월 23일, 어머니만 풍기에 남고서 우리는 내가 중학2년 때 신앙촌으로 올라왔다. 꿈이 이루어졌기에 즐거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완행열차에 시달린 뒤 서울에 내렸다.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신앙촌 입구에서 내려 한참이나 걸어 들어가자 문제의 신앙촌이 나타났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영화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과는 다른 씁쓸한 무엇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입구에서부터 주인 없는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들어와서 물어보니 주인 없는 상점은 없어진지 오래됐다고 하였다. 신앙촌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직매소에 가서 무엇을 샀는데 점원의 태도와 말씨가 사회인 점원보다 더 쌀쌀 맞아서 신앙촌 사람들이라고 별 다른게 없구나 하고 실망하였다. 그러나 신도들이 항상 얘기하듯 마귀의 시험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정작 전도사를 따라 언니가 사는 D8동에 가서보니 방이 너무 작고 초라한데 또 실망이 되었다. 나는 전도사에게 신앙촌 집은 다 이렇게 좁냐고 물었더니 넓은 집도 많지만 돈이 비싸다고 하였다. 신앙촌 집들은 모두 A동 B동C동 CD동 D동 F동으로 되어있었다. A~F동까지 모두 같은 평수의 집을 연립식 으로 나누어 A는 한집, B는 두집, C는 네 집, CD는 여섯 집, D는 여덟 집, F는 열 두 집이 살게끔 구조가 돼 있었다. 그러니 A동은 비싸고 닭장같이 작은 F동은 방값이 쌌다. 신앙촌에서도 돈이 많은 사람이 좋구나 생각하였으나 크고 편한 집에서 사는 것 보다는 작은 방에서 고생하며 믿는 것이 더 은혜가 될 것이라고 자위했다. 전도사는 여기는 잘 먹고 잘 살려고 온데가 아니고 잠시 머물러 갈 곳이니 모든 것을 감사하며 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D동 집은 한 채의 집에 어두컴컴한 복도 가운데로 나 있었다. 앞줄에 네집이 살고 뒷줄에 네집이 살게 돼 있는데 우리 집은 뒷줄의 7호실이었다. 바로 뒤에 또 집이 있어서 방은 어두웠다. 언니는 제과공장에 나가고 없었다. 뭘 좀 끓이려고 부엌에 가서 부뚜막 앞에 앉으니 엉덩이가 뒷벽에 닿을 만큼 좁았다. 살아보니 불편한 점은 더 늘어갔다. 옆집에서 불을 때면 우리 집 아궁이로 연기가 나와 부엌에 연기가 가득차기 일쑤였고 이 때문에 추운 겨울에도 방문을 열어야 하는 고충을 겪었다. 밤에는 옆집에서 부시럭 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러나 나는 구약성서 이사야 65장 21절에 기록 된 신앙촌의 건설이념을 굳게 믿고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일반교회와 달리 전도관 에서는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과 함께 ‘영모님’이 등장한다. 전도관의 기도내용은 대체로 이러했다. [말세의 마지막 사업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이긴 자 감람나무를 세워주심을 감사하옵나이다] [불철주야 저희 죄인들을 위해 애태우시며 피와 땀을 아끼시지 않는 영적 엄마의 심정을 만분의 1이라도 알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저희 가지들이 썩어서 元體(감람나무 박태선)까지 괴롭히는 일이 없게 하여주시옵소서] 일반신도의 기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시골에 있을 때 영모님을 사진으로만 보면서 영모님의 얼굴을 직접 대하며 함께 예배 보는 신앙촌 신도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고 늘 부러워 했는데 소원대로 매일 새벽예배 때마다 영모님 얼굴을 보게 되었으니 그것만 으로도 감사하였다. 노고산을 깎아지은 소사신앙촌 제단은 처음에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안에서 축구를 해도 될 정도로 넓었고 지금까지 ‘5만 제단’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수용인원은 그에 못 미치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영모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극성스런 어른들이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새벽 2시부터 와 앉아 있었고 나는 항상 뒷자리였다. 새벽4시에 일어나 4시 반의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것 조차 나로서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영모님의 설교말씀에는 [때가 얼마 남은 줄 아느냐? 얼마 남지 않았다. 신랑이 오실 때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애통하는 처녀들이 되지 말고 늘 깨어 힘써 기름 부은 자가 되어 신랑 예수께서 오실 때 쌍 손을 들고 기뻐 맞이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 또는 [세상 되어가는것을 보면 알 수 있는것이 .. 말세가 가까운 것은 무엇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등의 말세에 대한 내용이 많이 있었다. 세상이 종말에 가까웠다는 것은 전도관 모든 신도들의 뇌리에 박혔고 어린아이들 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팔도강산 곳곳에서 자기 나름대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전도관에 들어올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집안 식구기 모두 들어온 가정은 축복받은 가정이라 하여 부러워 하였다. 땅과 집을 정리하여 정든 고향과 친척을 버리고 교등학교와 대학을 중퇴한채 주님사업을 돕는다고 공장 종업원으로 들어간 사람도 많았다. 말세가 가까웠는데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않는 극성파 여인들도 많았다. 혼기가 찬 자식을 결혼시키지 않는 신도도 있었다. 신약 고린도전서 7장8절의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를 인용하여 기혼자보다 독신자가 믿음생활하기에 좋고 결혼하면 아무래도 세상열락에 빠져 은혜생활 하기에 힘들므로 결혼 않는 것이 믿음생활에 도움이 돤다는 것을 전도관 에서 자꾸 강조하였기 때문이었다. 전도관 에서는 영모님 말씀이 곧 법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결혼을 죄악시하며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시온고 에서 일반사회를 가르치던 김순영 선생이 신앙촌에서 유명하게 된 것은 속으로 하고 싶어도 남의 이목이 두려워 못하는 결혼을 그 선생님이 처음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주위에서는 그 선생이 믿음이 약하다고 수군거렸다. 도덕 담당인 박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여러분이야말로 얼마나 복된지 모르겠다. 나 같은 경우 이제야 참생명의 길을 알았으나 이미 가정을 가지고 있어 여러가지로 속박을 받지만 내가 이전에 영모님을 알았더라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선생님이 나간 후 아이들은 “저 선생님 사모님이 얼마나 예쁜데.. 저런 남편과 사니 한심해...”하며 깔깔 거렸다. 어수선한 수업시간 언니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공장에 나가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근무시간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 원래 신앙촌 공장은 노동시간이 법적 노동 시간보다 더 길었는 데다가 사람들은 주의 사업에 함 쓸수록 마지막 날에 많은 복을 받는다고 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였다. 언니는 소위 [은혜파]에 속하는 사람들처럼 근무시간 이외에도 봉사를 하였다. 한번은 언니를 따라 제과공장에 가 보았다. 규모가 작아보였고 하얀 가운을 입은 종업원 처녀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하는 일을 하나님 사업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님사업은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심지어는 늦게 까지 일하다가 과로와 영양실조로 쓰려져도 주님사업에 힘 쓰다가 그렇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우러러 보았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주를 위해 충성해야만 천년성에 들어갈 수 있을텐데 하고 학교를 다녀야 되니 도리어 언니가 부러웠다. 나는 언니와 함께 추운 골방 같은 곳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3월에 시온중학교 3학년으로 들어갔다. 남동생은 1학년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나간 입학 첫날부터 많은 실망을 느꼈다. 신앙촌 아이들이 사회의 아이들과 조금도 다를바 없이 거칠고 말광량이 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3학년은 4,5반이 여자반 이었다. 내가 들어간 4반 아이들은 정말 극성스러웠다. 그때 영어를 담당한 엄 선생님은 대머리에다가 앞니가 약간 뻐드렁니였다. 물상시간에 옴, 전기저항의 단위에 대해서 배웠던 한 학생이 영어 선생님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칠판에다 을 크게 그려놓고 그 안에 사람얼굴을 그리고 뻐드렁니를 강조한 뒤 옆에다 [옴 박사 뻐드렁니]라고 써 놓기도 하였다. 노는 시간에는 잠시도 쉬지 않고 장난이 계속 되었다. 교단 앞에 나와서 여러 선생님의 흉내를 골고루 내는 바람에 교실은 항상 웃음바다였고 왁자지껄했다. 교실에서는 말 타기 놀음도 예사였다. 수업이 시작된 줄 모르고 놀다가 단체기합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말 타기 하던 애들은 혼날 것 을 무서워하여 모두들 창문을 타넘어 도망을 가버리고 남은 학생들만 억울하게 손이 부르트도록 매를 맞았다. 학생들이 굴레 벗은 말 처럼 날뛰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학생들은 전도관 교리를 믿어서 신앙촌에 입주한 것이 아니고 부모가 믿는 바람에 저절로 따라온 셈이었다. 제단에 예배 보러 가기는 했지만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서 마지못해 습관적으로 나갈 뿐 이었다. 부모들의 가정교육에도 문제가 있었다. 거의 모든 엄마들이 신앙촌 물건을 파는 보따리장수(소비조합원)여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다 애들에게 너무 많은 금지사항이 뒤따르다 보니 불만을 터드리는 방법이 학교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규칙을 어기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4>편에 계속 <저작권자 ⓒ 국제기독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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