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자리 부탁 '야고보' vs 강도의 '소원'

[목회자 칼럼] 최후의 대화

전대환 경북노회 한울교회 목사 | 기사입력 2014/04/07 [05:13]

벼슬자리 부탁 '야고보' vs 강도의 '소원'

[목회자 칼럼] 최후의 대화

전대환 경북노회 한울교회 목사 | 입력 : 2014/04/07 [05:13]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서 23:39-43>
 
# 들어가는 이야기
 
어제가 24절기 가운데 청명(淸明)이었습니다. 이날부터 하늘이 화창해지고 날이 풀리기 시작한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청명이라고 해도 도시에서는 특별한 변화가 없지만, 농촌에서는 이 무렵부터 바쁜 농사철이 시작됩니다.
 
하늘이 그렇듯이, 우리 마음도 1년 사시사철 청명할 수만은 없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은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해서,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적응을 잘해서, 늘 역동적인 삶을 이어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강도 1
 
오늘이 사순절 다섯째 주일이고 다음주일이 종려주일이니까 사순절도 어느덧 막바지입니다. 사순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십자가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과 나누신 마지막 대화를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몸이 아프면 어떻습니까? 만사가 귀찮지요? 당연히 말도 하기 싫어집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이란 인간이 겪는 고통 가운데서 최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누고 싶겠습니까? 긴급하고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대화의 상대는 강도들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한 대화임이 분명합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이분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능력이 출중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온 나라에 알려져 있었을 테니까요. 대중적 인기란 참 덧없습니다. 그렇게 인기 있던 분이 사형을 당하게 되니까 군중이 돌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칭송을 쏟아내던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못마땅케 여겼던 사람들은 모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당신, 능력 많잖아. 십자가에서 탈출해봐. 그러면 폼 나지 않겠어?” 이런 식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형을 당하게 된 진짜 강도조차도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 강도 2
 
이 강도는 자기가 저지른 강도짓 외에 지금 이 자리에서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첫째, 이 사람은 자기의 판단에 따라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에 따라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건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까는 것이 대세인 것 같으니까 그저 그 장단에 놀아나는 것뿐입니다.
 
둘째, 이 사람은 ‘구원’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으로 구원이란 그저 순간모면일 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에게 구원이란 십자가를 모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구원을 위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그런 것 따위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단세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셋째, 이 사람은 상당히 수동적인 사람입니다. 자기는 가만히 있고 예수님이 도깨비방망이를 두들기면 ‘뽕!’ 하고 자기가 구원받는 줄 압니다. 세상만사 호응 없이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고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요. 뽀뽀도 서로 좋아해야 제대로 된 사랑의 행동 아닙니까? 한족에서 강제로 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추행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은, 나는 가만히 있을 테니 네가 날 좀 구원해보라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사람은 강도짓만 한 사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못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 옆에 있던 또 하나의 강도는 달랐습니다.
 
# 예수
 
망나니 같은 강도의 말을 듣다 못한 이 사람이 야단을 칩니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이 들어보니 참 매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강도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생각이 참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오리지널 강도라기보다는, 홍길동 같은 의적(義賊)이거나, 아니면 반정부 투쟁을 하다가 강도로 몰려서 사형까지 받게 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강조했던 ‘하나님의 나라’ 곧 ‘주님의 나라’를 언급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했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죽더라도 당신은 어떻게든지 살아서 평소에 이야기하던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지 모르니, 그때 나를 좀 기억해 달라, 그겁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나라가 올 때 자기들에게 벼슬자리를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 사람은 그저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보다 더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지요.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강도는 주님의 나라(바실레이아, basileia)를 말했는데 예수님은 낙원(파라다이스, paradeiso)를 말했습니다.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이 둘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려고 했던 나라이고, 낙원은 죽은 뒤에 오는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당장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 네가 그것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너는 죽어서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런 말입니다.
 
# 맺는 이야기
 
여러분,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숨이 끊어지는 즉시 염라대왕을 만나게 될까요? 아니면 육체에서 영혼이 ‘쓩!’ 하고 빠져나와서 껍데기는 땅에 두고 영혼만 천상의 세계로 날아가게 될까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 이야기는 설명하기가 복잡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는 우리가 죽는 것을 ‘자는 것’에 비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강도처럼 욕을 버럭버럭 해대며 멀쩡한 사람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사람이 잠을 잘 자겠습니까, 아니면 두 번째 강도처럼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께 의탁한 사람이 잠을 더 잘 자겠습니까?
 
죽음 이후의 세계를 우리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나왔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아울러 죽음 이후에 있을 낙원까지 준비하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2014.4.6 구미 한울교회 주일예배 말씀입니다.)
 
[출처: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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