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워지는

김주한 목사(한신대 교목실장, 교회사학) | 기사입력 2013/10/14 [03:29]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워지는

김주한 목사(한신대 교목실장, 교회사학) | 입력 : 2013/10/14 [03:29]
[편집부 주] 이 글은 지난 9월 24일부터 27일까지 전라북도 군산성광교회(군산노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워지는 교회’를 주제로 열린 제98회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장 나홍균 목사) 총회 주제 강연문 전문입니다.
 
 
1. 시작하는 말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역사에서 2013년은 중대 변환의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을 선도해 온 기장은 금년 10월 부산에서 개최될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를 계기로 세계교회가 축적해 온 보편적 상식과 합리성을 공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교단의 ‘새 역사 60주년’을 맞이하여 기장교회의 역사적 유산의 공과(功過)를 재조명하고 교단의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고 해소하는 일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회고해 보건대 ‘기장’은 식민지배와 해방, 분단이라는 질곡의 역사 속에 배태되어 6·25전쟁과 재건운동,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현재의 성취와 모순의 질곡에 이르기까지 초 압축적으로 진행되어 온 숨 가쁜 한국현대사와 궤를 같이 해왔다.
 
지난 60년 기장교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노선적인 흐름은 분명했다. 그것은 ‘공교회(the public church)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교회’였다. 기장을 기장되게 한 것은 신앙을 개인적 영역에 가두어놓지 않고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이요 신앙의 엄정함과 도덕성, 책임성이 밑받침 된 교회를 구현해 왔다는 점이다. ‘사회선교’ 신앙과 실천에서 기장은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었다.

그러나 기장교회가 대면해야 하는 오늘의 한국사회와 교회현실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IMF 관리체제가 결과한 충격과 고통은 계층 간의 격차를 심화시켰고, 구조화된 정치모순과 부조리는 다수의 공익과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실종을 초래하였다. 또한 그간 한국교회의 주요 문제로 지적되어 온 ‘강한 보수성과 배타주의, 세속주의, 개교회주의, 종교의 사사화(私事化)’는 우리 사회의 긴장의 강도를 더욱 높여 놓았다.
 
결국 이 모든 요소들은 한국교회의 사회적 권위와 영향력 상실로 이어졌고 기장교회 또한 이 같은 흐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더군다나 ‘신세대, 신문화, 신사고’로 특징되는 시대의 가치관과 제도들은 전통주의적 교회관과 신앙의 패러다임을 급속하게 해체시켜 ‘교회생태계’를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이처럼 피해갈 수 없는 변화된 현실 앞에 기장교회는 여전히 ‘새 역사’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으면 없는 만큼 금번 총회 주제가 갖는 시대사적 의미와 중요성은 선명하게 확보될 것이다.

제98회 총회 주제는 2천 년대 시작부터 작년까지 총회가 선정한 주제와 차별성을 갖고 있다. 지난 13차례 총회 주제에는 한 가지 뚜렷한 방향이 설정되어 있었던 바, 교회의 대사회적인 문제들(사회정의, 민족화해, 통일, 생명 생태문제, 정의와 평화 문제)이 주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교회 밖 세상에 관심하여 ‘사회적 책임신앙’을 지향하였다. 금번 총회 주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는 메시지는 교회 밖 세상을 향해 쏟은 열정만큼이나 교회의 내적 성숙을 위해 역량을 집중해보자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기장다움을 잃지 않는 진정한 ‘교회다운 교회’를 지향해보자는 절박함과 ‘저성장’의 위기에 직면한 개교회의 현실적인 고충이 반영되어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사뭇 원론적이고 본질적인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신앙의 근본적인 물음은 무엇인가? 기장교회의 정체성의 근간은 무엇인가? 기장교회다운 성장, 이것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가능한지 그 대안을 마련하고 전략을 수립하여 기장교회 구성원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총회 주제 성구의 말씀을 깊이 헤아려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워지는 교회”라는 주제의 깊은 뜻과 또 이 표어를 결단의 차원에서 고백하는 모든 기장인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2. 주제 성구의 배경과 초점
 
주어진 세 개의 성서 본문의 상관성과 그 상응성은 ‘빛의 모티브’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성서에서 이 ‘빛’은 무엇을 상징하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미가 선지자에게 ‘빛’은 ‘정의’와 연결되어있고, 요한 일서는 ‘사귐의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으며 요한복음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미가 선지자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야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주전 8세기 정치적 격변기에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미가는 정치, 종교지도자들의 부정부패에 탄식한다. 미가는 탐욕적이고 반(反)사회적인 부패세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2장-3장). 특히 종교지도자들(사제들)의 거짓 선포와 탐욕에 대한 화(禍)선언(미가 3:9-12)은 시온과 성전 파괴의 위협으로 이어진다. 결국 심판은 임하였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졌으며 온 백성들에 대한 형벌이 가해졌다.

이 상황에서 미가가 받은 신탁은 이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내 권리를 지켜주시고, 나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니, 내가 주님께서 행하신 의를 볼 것이다.”(7장 9절). 여기서 주목해 볼 단어는 ‘빛’(오르)과 ‘의’(치드카)이다. ‘빛’은 어둠을, ‘의’는 불의와 폭력을 전제한다.
 
미가가 전제한 어둠과 불의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요약된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끊임없이 착취하고 억압해 왔다. 그들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하며 백성을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낸다.’(3장 2절). 종교지도자들 또한 ‘뇌물을 받으면 좋아하고 입에 먹을 것만 주면 좋은 말만 해댄다.’(3장 5절). 이들의 폭력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는 현재 ‘어둠’(호쉐크)에 휩싸였다.

미가는 외친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또 이 심판은 피할 길이 없고 이미 저지른 악행에 대한 무서운 징벌이 내릴 것이라고.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의 또 다른 사태이다. 미가는 어둠의 세력들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야훼의 도시 예루살렘/시온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빛’은 생명의 빛이요 구원을 표상한다. ‘빛’이 있는 곳에 더 이상 불의와 폭력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정의’가 있을 뿐이다. 미가에게 ‘빛’과 ‘정의’는 동의어이다.

미가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처참한 현재와 대조하여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이 희망은 공동체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철저한 회개에 근거해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죄를 시인하고 형벌과 고통을 감내하는 자가 차지한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오직 하나, 그것은 인간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려는 의지이다.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관계는 심판을 통해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인된다. 예언자 미가의 입술에 공동체의 희망이 주어진다. 그리하여 ‘미가’란 말의 의미처럼 공동체 모두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7장 18절)를 외치게 된다.

요한 일서가 사용하는 ‘빛’은 ‘사귐’(코이노니아)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빛’은 윤리적 차원보다는 ‘구원적 성격’이 강조된다. 본문은 ‘빛 가운데 사는 것’과 ‘어둠 속에 사는 것’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그 차이 즉, 어둠 속에 행하는 것과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의 차이는 ‘서로 사귐’의 여부에 달려있다. 사귐이 없는 곳에 거짓이 난무하고 진리가 부재한다. 거기는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곳이다. 반대로 사귐은 공동체의 사랑과 평화를 상징한다.
 
‘서로 사귀는 것’이 곧 빛 가운데 사는 삶이요 공동체의 본질이다. 일찍이 본회퍼는 ‘사귐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였다. 그에게 교회란 ‘사귐으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다. 성도의 사귐 속에 그리스도는 실제로 체험되는 분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이룩하고 지탱해 나가는 원동력은 우리 모두 용서받은 죄인이 되는 것에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의 목적은 섬김에 있다고 보았다. 결국 사귐으로서의 교회공동체는 ‘타자를 위한 존재’이다.

요한이 사용하는 ‘빛’의 이미지는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고 선포하신다. 이 말씀에 담긴 주님의 진의는 무엇인가? 예수가 세상의 ‘빛’(포스)이라는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진술이다. 말하자면 ‘내가 세상의 빛 이듯이 너희도 빛이 되라’는 명령 혹은 권유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과 같다’는 일종의 비유법이다.
 
‘빛’의 의미는 ‘산 위의 마을’이나 ‘등경 위의 등불’을 설명하는 마태복음 5장 14-15절과 연결 지어볼 때 주님의 본뜻이 드러난다. ‘산 위의 마을’이나 ‘등경 위의 등불’은 감출 수 없다.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고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빛’이란 ‘드러나고 노출 될 때’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빛’이라는 속성을 들어 제자도의 본질을 설명한다. 마치 ‘빛’이 드러남을 통해 제 역할을 감당하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노출, 드러남’을 통해 본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자도의 핵심은 드러남 혹은 보여줌에 있고, 제자들의 공동체는 숨겨질 수 없는 존재이다. 적용하자면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고 드러날 수밖에 없는 존재고 그 본질은 보여주는 역할에 있음을 암시한다.
 
등불을 켜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등대 위에 놓아두는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공동체를 이 세상의 등대 위에 놓아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도록 하셨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의 제자도의 본질을 설명한 저 유명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첫 장이 요한복음 8장 12절을 인용하며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리라’(요 8: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누구든지 빛 속에 살기를 원하고 마음의 모든 흑암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그리스도의 삶과 그가 걸으신 길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는 자신의 삶과 삶의 방식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충고한다. 우리가 가슴의 맹목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워지고 참으로 해탈하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토마스는 말한다. 그렇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을 오늘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재현함으로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된다.

이처럼 세 개의 성서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의 공통된 성격은 ‘빛’이며 우리의 관심은 빛과 유비적 관계 속에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인식하는 일이다. 빛과 이스라엘, 빛과 제자공동체 사이에 유비적인 연결이 있듯이 빛과 교회도 유비적으로 연결된다. 선택된 세 개의 성서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어두운 무언가를 비치라는 타동사적인 의미보다 스스로가 밝은 빛을 가진 존재로 드러나고 노출된다는 사실이다(마 7, 2; 17, 행 12, 7). 빛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면 구원의 전제조건은 ‘정의’의 실현(미가)이요, 진리를 행하며 사귐을 통한 평화공동체 구현(요한)에 있다.
 
교회의 신앙적 응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주어진 성서본문의 이해를 통해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이해는 확보된 셈이다. 그것은 ‘정의, 평화, 생명’이다. 결국 성서본문은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의 주제와 내용적인 연관성을 지닌다. 자아! 이제 교회 이야기에 집중해 보자.
 
3. 우리는 어떤 교회를 지향하는가?
 
1)‘1953년 체제’이후 기장교회의 표준
 
1953년 기장교단의 출범은 비유컨대 한국판 종교개혁이다. 기장교회 운동은 온갖 모순들이 과대 응축된 한국교회 현실과 불가분리적으로 상호 접합되어 있다. 해방이후 분단, 건국,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는 격동의 질풍노도를 거쳤다. 분단이 초래한 한국적 반공사회의 규율체제는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모든 영역을 잔인하고도 억압적으로 통제하는 기제로 작동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교회(장로교회)는 일제 침략기 시절 변질되고 훼손되었던 조직을 채 정비하기도 전에 신학방법론의 문제 및 성경의 권위와 해석에 대한 차이로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교권, 즉 교회정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기장교회는 교권과 정통·근본주의 신학 교리에 포로 되어 있는 한국 교회의 모순을 직시하고 ‘복음과 신앙 양심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38호헌 총회 선언문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교회의 본질적 성격과 특성을 형성해 왔다. 기장교회는 이른바 한국기독교계의 ‘새로운 프레임’이요 새로운 교회표준의 상징이었다. 기장교회는 한국교계를 지배하고 있는 근본주의적 신앙관의 한계와 모순을 직시하고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당위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60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기장교회의 현주소는 ‘저성장, 재정 약화, 정체성 혼란’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기장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의 문제와 맞물려 있지만 지난 시절 기장교회의 역량과 비교해 볼 때 그 상대적 위축감에 대한 체감온도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기장교회가 보인 약점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개인적 종교로서의 복음주의적 교회들의 특성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기장교회는 근본주의 신앙의 바탕위에 서 있는 대다수 한국개신교회가 표방한 ‘불신자 개종전도, 개인구원,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 강조’등이 만들어내는 성장 메카니즘을 ‘복음의 사회적 책임성’을 앞세워 간과하였다. 그리하여 복음화냐 인간화냐,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양적 성장이냐 질적 성장이냐 등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마치 양자택일의 문제처럼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다.

둘째 교단이 표방한 선교 과제와 방향이 개교회 현장 속에 깊이 뿌리 내리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거대담론(‘민주화, 인권, 통일운동’ 등)의 선교적인 관심을 개교회 현장이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은 개교회 현장에서 교회정체성 혼란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기장교회는 정치·사회 운동을 통해 형성된 자기정체성을 교회의 정체성으로 동일시하여 선교의 폭을 좁혀 놓았다.
 
개개인의 영혼을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 개교회 현장에서, 교단이 제시한 선교적 거대 담론들은 평범한 신자들의 눈높이에서 소화해내기 어려웠다. 역사성을 상실한 신앙이 탈사회적 개인주의화로 빠질 위험이 있듯이 개인의 내적 성화 없는 사회운동은 복음을 정치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정치 권력화에 빠질 위험이 있다. 영성 없는 기독교사회운동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같은 문제를 반성하여 지난 2003년 기장교회는 교단출범 50주년 희년의 해를 맞아 향후 기장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희년문서는 ‘은총, 생명, 섬김’을 교회가 이루어야 할 삶의 본질로 정리하였다. 또한 희년문서는 이 세 요소를 중심에 놓고 개교회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목회, 선교, 교육, 생활 지침’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을 바탕으로 한 정치·사회적 차원과 교회, 예배, 개인영혼, 중생 등과 같은 부분을 중요하게 다루는 영적·교회적 차원의 구원사역을 종합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또한 1987년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보한 이후 달라진 한국정치 현실 속에서 권위주의정권 시절 형성된 기장교회의 이미지를 보완하려는 노력이 반영되었다. 문제는 희년문서가 표방한 기장교회의 정체성과 목회사역의 새로운 정립이 ‘1953년 체제 이후의 기장교회의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또 기장교회 구성원들 사이에 얼마만큼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2)교회 2천년: ‘위기’와 ‘변혁’의 역사
 
현 단계 한국개신교회에 대한 여러 지표들은 ‘위기상황’임을 보여준다. 2012년 현재 한국사회 개신교인 수는 인구대비 22.5%이다(천주교는 10.1%). 일천 백만이 조금 넘는 수치이다. 지난 2004년(26.7%)와 비교해 볼 때 개신교인 수는 완만한 감소추세에 있다. 혹자는 이러한 추세가 지속될 경우, 저출산과 고령화의 인구학적 변화와 맞물려 2060년경 개신교 인구는 550만대로 줄어든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내놓았다. 이 같은 산술적인 지표 외에도 한국 개신교회의 위기의 정체를 물으면 ‘배타주의, 교회의 분열과 역사와 사회에 대한 몰인식’등이 지적된다.

그러나 정작 근본적인 위기는 따로 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교회는 위기이지 않을 때가 없었다. 이것은 오늘의 위기 상황을 과소평가하거나 상대화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진짜 참 위기는 우리 내부의 불신과 냉소주의요, 그와 같은 시대적 위기를 새로운 개혁이나 변혁으로 견인해 낼 수 있는 역동적인 의지와 희망, 실행력이 공동체 구성원 안에 존재하느냐의 여부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늘 위기였다. 교회 그 자체는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로서 그리고 ‘세상에 대한 대안으로서’ 세상의 위기를 초래했다.
 
세상이 볼 때 교회는 불편한 존재였다. 이 점에서 교회는 그 자체가 정치적이다. 이와 달리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고 세속화되는 과정에서 위기를 맞이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개신교회는 ‘하나의 대안 공동체’로서 세상의 위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걱정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교회의 역사 속에서 교회의 두 가지 위기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반국가세력의 혐의’를 받아 위기를 맞이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했던 초대교회의 신앙은 그 자체가 공적인(public) 진리였다. 초대교회가 갖고 있던 구원과 선교의 비전은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구현하는 종말론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종교적으로 소수파요 문화적으로는 이교적이며 세속적인 그레꼬-로만 사회에서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질서와 분명히 대비되는 하나의 ‘대항문화적인 공동체’로서 대안사회를 이룰 수 있는 기독교가치관을 제시하였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A. Synder)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교회는 당시의 지배 문화 속의 하위문화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문화 속에 새로운 대안문화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단지 영적인 갱신이 아니라, 사회적 혁명이었다.”

기원 4세기 초 콘스탄틴 체제의 등장과 함께 교회는 ‘정체성 상실’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AD 313)과 함께 교회는 초대교회가 표방했던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차원의 역동성을 상실하였다. 교회는 제국의 종교로 변모하면서 세속권력화 되고 제도화되면서 구원의 문제가 개인화, 교회화 되었다. 교회의 콘스탄틴화(=권력화)가 지속되면서 중세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체제를 만들어 냈다.
 
교회는 ‘구원’을 독점하게 되고 세상은 개종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은 교회라는 매개체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었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는 성(聖)과 속(俗), 선(善)과 악(惡)의 이분법적 구도였다. 성직자중심의 중세교회는 세상과 인간현실에 대해 무감각한 모습을 보였다. 교회는 세상 국가와 대별되는 또 하나의 사회질서로서 하나의 ‘왕국’(Christendom)이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지나치게 접근 혹은 동일시하여 그야말로 ‘하나님의 왕국’으로서의 교회모델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성직자중심의 중세교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복음의 본질과 참교회상을 회복’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루터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씨름한 개혁자라면 칼뱅은 ‘참된 교회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고심하였다. 루터가 ‘오직 은총을 통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대답을 얻었다면 칼뱅은 ‘하나님 말씀과 올바른 성례전’ 이 두 가지를 교회의 참된 표지로 보았다.
 
루터와 칼뱅은 모두 로마교황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의 전통과 법률에 대항하여 성서의 수위권를 주장하였고, 교황의 권위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수위권을 강조하였으며,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과 업적에 대항하여 은총과 신앙의 수위권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저 유명한 종교개혁교회의 슬로건, 즉 ‘오직 성서,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의 원리가 탄생하였고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표준’이 되었으며 ‘교회의 존망이 걸린 교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교회의 신앙과 전통은 근대 계몽주의 사조와 혼합되면서 ‘교회의 분열과 역사성 상실’의 위기로 이어졌다. 이제 교회는 세속정부와 협정 내지 조약에 힘입어 철저하게 서로의 영역을 보장해 주며 공생 공존관계로 세상 속에 현존한다. 인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조하였던 계몽주의 모더니즘은 기독교신앙의 개인주의화를 부추겼고 기독교신앙을 일종의 ‘자아갱신운동’으로 변질시켜 놓았다. 이렇게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공적인 영역에서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 감소는 수많은 교파분열로 이어졌다.
 
19세기 근대국가들의 탄생과 함께 교회는 세속 조직과 협력을 통해 사역을 전개하였다. 교회는 세속 국가의 일정한 지원과 지배계급의 도움을 통해 각종 선교 사업들을 실시하였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이런 교회를 “보수적이고 정통적”이라고 명했다. 이런 교회는 어떠한 개혁에도 의구심을 갖으며 권위주의적이고 전제주의적인 통치 아래서 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다.
 
교회의 메시지는 탈 정치적이며 예언자적인 증언보다는 사제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교회는 정치영역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교회의 모델은 ‘세속권력에 너무 깊이 연루되는 경우가 많고 가난한 자들의 교회나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교회가 아닌,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로 남는다. 보프는 이런 교회 모델을 ‘어머니와 교사’로서의 교회로 명명하였다.

20세기 들어 교회는 “세속주의의 위기”를 경험하였다. 1952년 빌링겐 국제선교대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신학’(Missio Dei)이 등장한 이후 교회는 선교의 증언자요 도구로 이해되었다. 교회가 선교해야 할 영역에서 성과 속의 이원론이 철폐되고 사적 영역(신앙, 교회, 가정)과 공적 영역(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구분이 사라졌다. 이제 교회의 주요 문제는 교리나 예전적인 것보다는 인권, 정의, 노동 등 정치·사회적인 의제가 주를 이루었다. 한 때 세속적인 것들로 간주되었던 문제들이 선교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신앙의 주된 항목으로 등장하였다. 교회만이 아니라 인간과 세속의 현실 또한 구원과 은총의 가능한 수단이 되었다.
 
교회는 사회변혁 운동에 참여하였고 인권, 정의, 생명, 평화운동 세력들(시민사회운동)과 연대하였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시대정신에 적응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상징들을 세속화시키고 예전을 간소화시켰다. 세계는 하나님의 활동 무대요 지금 여기는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는 자리로 이해되었으며 그 나라는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적 미래로 개방되어 있다. 보프는 이러한 교회의 모델을 “구원의 성사로서의 교회”로 불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역사 속의 교회는 늘 위기였다. 현실 사회에서 모범답안의 교회가 과연 역사 속에 존재했느냐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 기준과 근거가 얼마나 성서가 말하는 교회의 본질과 사역에 근접해 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말해주는 성서본문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 예수께서는 교회 건립에 대한 발언을 하신다(마 16:18). 그 다음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 24-25). 다시 말하면 교회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신앙고백 공동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의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위임하였다. 그 위임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은 바로 예수로부터 위임받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근거해 있다.
 
3)하나님 나라와 교회
 
하워드 스나이더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대신 교회 자체를 세우는 일에 관심하게 되면 언제나 문제가 생긴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그는 ‘교회 자체에 관심하는 사람’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교회를 섬기는 사람’ 사이의 차이를 흥미롭게 대비시킨다.: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여러 활동들, 즉 종교적인 행위와 신령한 것들에만 신경 쓰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에 신경을 쓴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느냐를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느냐를 생각한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킬까 봐 염려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결국 그는 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사람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구상하는 대로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내실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질, 사역, 형태를 형성해야 한다. 예배, 친교, 성례, 전도, 봉사, 인권, 민주, 평화, 생명운동 이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 나라의 경륜(economy)과 관련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같은 교회의 사역들은 교회 자체를 위한 비즈니스에 불과하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성을 논구할 때 경계해야 할 점은 두 가지이다. 먼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여 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인본주의적인 태도이다(성직자중심의 교황교회). 또 사회정치적 영역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여 세상의 질서를 혁명적인 방법으로 개편하여 이 땅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열광주의자들(극단의 재세례파와 토마스 뮌처 등)의 태도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란 이 세상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여 정치, 사회, 문화 영역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가운데 영적인 분야에만 헌신하려는 태도이다(신비주의적 소종파).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실재하지만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으며(마 3:2; 4:17; 10:7), 여전히 오고 있는 우리의 희망이다. 교회는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조망한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 근거는 종말론적 희망이다. 종말론적인 희망을 상실하고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온갖 인간적인 구상과 프로그램만 난무하는 교회는 나쁜 교회가 아니라 교회이기를 포기한 교회이다.
 
로마제국의 박해가 교회의 씨를 말려버릴 기세였어도, 레닌-스탈린의 공산주의 탄압이 아무리 극심했어도, 일제가 한국교회를 제아무리 핍박했어도 지난 2천년 동안 교회는 사라지지 않고 꿋꿋하게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악에 대한 최후의 승리를 보장 한다’(마 13:30, 41, 47-50)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절정은 악/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을 위한 영생의 승리를 보장한다(마태 13:43; 8:12; 18:23-34; 25:46)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저 미가 선지자의 낙관적인 외침도, 요한의 사귐의 공동체도 빛으로 오신 예수가 바로 종말론적인 희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지 않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그들은 심판 날에 도리어 심판을 당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종말론적인 비전이 사라지고 이 세상의 세속적인 신념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용주의 철학에 근거한 효용성과 성공지상주의적인 마케팅 전략이 교회의 모든 사역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야말로 교회가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기관이나 제도가 되어버렸다. 이 같은 교회는 세상에서 이익과 성공을 하나님 은혜의 증거로 높이 평가하고 종교적으로 미화한다.
 
그러나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성공은 아니다. 또 이 세상의 실패가 하나님 나라에서의 실패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야망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될 수 없다. 세속주의 가치관이 교회의 신앙을 지배할 때 업적과 공로가 구원의 근거로 둔갑하고 하나님은 소외당한다. 그 때에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간이 차지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주도권이 실현된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이 주도하는 ‘세속의 교회’가 되어버린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이다.

그러나 기억하자! 하나님의 교회는 위기일 수 없다. 위기라면 교회의 위기를 말한 사람들의 위기일 뿐이다. 현 단계 한국개신교회가 대사회적인 공신력을 상실하고 복음의 능력이 공적영역에서 사적영역으로 축소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구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교회의 몰락이나 교회무용론을 말하는 것은 ‘본질과 현상’을 구분하지 못한 착시의 결과이다. 교회 자체가 갖고 있는 복음의 본질적인 능력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다.
 
세속주의, 상대주의(친절한 불가지론), 개교회주의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이러한 시대의 도전에 맞서 교회는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더 이상 제 살 깎기의 패배주의나 냉소, 비판은 도리어 방해가 될 뿐이다. 한국사회에서 기장교회의 브랜드(이미지)효과는 분명히 존재한다. 브랜드나 이미지가 좋다고 늘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미지가 나쁘면 성공할 것도 패배한다. 기장교회는 ‘기장교회만의 표준과 특성’을 더욱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기장교회의 실패는 한국기독교의 실패이다. 기장교회는 여전히 한국사회의 희망이고 또 희망이어야 한다.
 
4. 마치는 말: 기장교회와 미래전망
 
기장교회는 지난 60년 동안 어떤 이념과 정신, 교회의 틀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했는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지나치게 접근시킨 ‘성직자 중심의 교회’였는가? 아니면 기성체제와 협력 속에 교회 위계질서(hierarchy)의 권위에 의존한 ‘어머니와 교사로서의 교회’였는가? 아니면 사회적 조건들을 개혁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생각한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로서의 교회’였는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현실사회에서 모범답안의 교회를 규정하기란 힘들다. 교회의 형태는 언제나 역사적 정황에 따라 조건 지어진다. 그러나 그 형태는 항상 교회의 본질을 출발점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 본질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종말론적 희망의 근거로서 교회모델”이 미래의 교회상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교회의 건강성은 이 희망이 존재하느냐 부재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난다. ‘종말론적 희망’ 안에 존재하는 교회는 성령(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받으며 성령의 통치를 받고 성령을 따라 자유를 누린다. 그야말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이다.

“종말론적 희망의 근거로서 교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 교회는 세상에 현재하면서도 세상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이 교회는 세상의 질서와 대비되는 ‘대항공동체’이다. 이 교회는 그 자체가 새로운 사회적 질서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 낸다. 그런 점에서 이 교회는 세상의 위기로 존재한다.
 
분명히 해 두자.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사람들의 공동체이지, 이 세상 문화를 본받는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가치를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맞바꾼 공동체이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고.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요 15:19). 교회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데서(왜냐하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기 때문)오는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이 긴장감이 사라질 때 교회는 세속주의에 빠진다. 따라서 교회는 이 세상질서와 싸워야 하는 존재이다.

둘째 이 교회는 교회의 모든 교역활동(설교, 세례, 성만찬, 예배, 전도, 구제활동, 사회참여 등)을 철저하게 종말론적인 이해 속에 재정립한다. 설교는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계시하고, 세례와 성만찬은 이미 일어난 메시아적 고난에 대한 기억과 장차 일어날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친교의 식탁을 보여주며, 전도, 봉사, 정치·사회 활동들은 장차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과 연결된다.
 
교회의 내적 활동은 종말론적인 비전 아래 이루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사회 정치적 결과를 수반한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말씀과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속과 죄의 용서, 화해’에 초점을 맞추고 개인영혼 구원을 강조하였다. 또한 하나님 나라란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가는 ‘천당’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종말론적 희망의 빛과 성령의 능력 안에 존재하는 교회는 개인의 죄 용서와 영혼 구원(Justification)을 반드시 사회적 성결(Sanctification)과 연결된다. 이 교회 안에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이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기능을 교회 안에 가두지 않는다. 이 교회는 종말론적인 시야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역사에 기꺼이 동참한다. 교회는 어떠한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려 한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건을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재현하여 원초적 영성을 회복하려 한다. 어느 한 라틴 아메리카인의 기도가 이 교회의 특징을 잘 대변해 준다. “오 하나님! 굶주린 사람들에게 밥을 주시고 밥을 가진 우리에게는 정의를 향한 굶주림을 주소서.”

마지막으로 이 교회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교회”(ecclesia reformata et semper reformanda)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며 변화된 현실사회를 냉철하게 직시한다. 일찍이 김재준 목사는 교회가 개혁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은 계속 창조하시고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이고 세상은 마치 급한 경사면을 흐르는 강물처럼 급류가 되어 구르기 때문에 교회가 자칫하면 익사하거나 망각지대에 몰려 매몰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개혁교회란 부단히 개혁하여 세상 급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다시 한번 칼 바르트의 외침이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한다.:“떨쳐 일어나 방향을 전환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님이심을 고백하자.” 진실로 우리 모두는 개혁의 주체임과 동시에 개혁의 대상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출처]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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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rmen 2014/08/17 [05:14]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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