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 英 恩 ‘東方의 義人을 믿게 되다’ [천년성 거룩한 땅 들어가려고 오늘도 모여 왔네 우리 성도여 사랑과 화평속에 한 맘이 되어 감람나무 향기 속에 귀엽게 자라세] 윤극영 씨가 작곡한 초창기 전도관의 대표적인 찬송가의 한 구절 이다. 나 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 모두가 그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고 열광하던 때가 있었으니 돌이켜보면 허망하기 그지없다. 노래가사에 나오는 감람나무는 현재는 땅 위의 하나님으로 자칭 승격하였으니 하나님으로 불리 워 지기 전 까지는 ‘동방의 의인’ ‘주님 재림의 길 예비자’ ‘이긴 자 감람나무’ ‘영모님’ ‘영적엄마’ 등으로 불리 운 인간 박태선 씨였다. 그가 자칭 동방의 의인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구약성서 이사야 41장2절에 근거를 둔 것이라 했다.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에서 동방은 동양이며 41장 25절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는 극동을 가리키고 극동에서 일본이 아니하는 근거는 41장 1절의 ‘섬들아 내 앞에서 잠잠 하라...’했으니 섬 나라인 일본은 조용하라는 뜻이고 41장 9절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 너를 부르고...’라고 했으니 이는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말세의 의인이 나타난다고 해석한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이사야 41장 25절에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라는 것은 박 씨가 고향인 평남 덕천에서 월남 했으니 북방에서 온 것이라 하였다. 박씨는 1955년 당시 서울 성동구 무학교회의 집회를 시발로 전국 각지에서 집회를 열어 병자를 고치고 기사와 이적을 발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집회는 항상 초만원을 이루었다.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는 박태선 교단을 사이비 교단으로 규정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에 박 씨는 교단을 이탈하여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를 결성하여 전도관 조직을 탄생시켰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인 경북 풍기의 용천동 산골에 사는 이모의 손목에 이끌려 조그마한 개척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는 풍기면 에서 봉현면으로 가는 남안다리 못 미쳐 국도변에 있었는데 허술한 목조 2층 건물을 대강 꾸려 제단(예배당을 그렇게 불렀다)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예배를 볼 때는 찬송 소리보다 박수소리와 북소리가 더 컸다. 전에 교회에 몇 번 나가본 적이 있던 나는 조용한 교회의 예배보다 훨씬 신이 났다. 게다가 전도사가 워낙 다정스레 대해주어 곧 정이 들었고 이후 언니와 같이 계속 전도관에 나가게 되었다. 제단의 앞 벽에는 예수 사진과 나란히 한 젊은 미남자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분은 전도관 에서 가장 받드는 재림하실 예수님의 길잡이가 되시는 ‘이긴 자 감람나무’라고 하였다. 나는 그분이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훌륭한 분 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성도들은 그를 ‘영모님’이라 불렀고 그의 은혜에 감격했을 때는 ‘엄마, 엄마, 우리엄마, 저희 죄인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피눈물 흘리시는 영적엄마...’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하였다. 이모의 끈질긴 권유 이모는 16세 때 연화동이라는 두메산골로 출가하여 모진 가난을 겪으며 결혼 초를 보냈다. 극심한 시모의 학대와 초산 때 잘못된 산후 조리로 계속 고질병을 앓아오다가 당시 박태선 씨의 영주집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깨끗이 나았다. 성령의 은혜로 나았는지, 정신적 변화로 나았는지는 모르지만 나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모네 일곱 식구는 자연히 일시에 믿게 되었고 우리 집에 함께 계셨던 외할머니는 큰 딸의 병 고침에 너무나 감사하여 엄마까지 제단에 나가라고 성화였다. 32살에 홀로된 어머니 역시 자녀 넷을 거느리고 갖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으니 잔병이 끊이지를 않았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성격이 날카롭고 깐깐한 편이라 처음에는 할머니의 권유를 일축했으나 이모의 끈질긴 전도에다 자식들이 모두 다니게 되자 할 수없이 믿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박 씨가 의인이라는 것을 확신하지는 않았으나 전도사인 이태영 씨의 인품에서 전도관이 옳은 길이라고 점차 믿게 되었다. 이태영 전도사는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 자기 집안이 조상 대대로 수명이 짧아 부모가 모두 30갓 넘어 죽고 외아들로 남아 자신도 얼마 살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어 주님사업에 몸 바칠 것을 결심하던 중 전도관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한 40만환을 가지고 단신으로 개척전도사로 부임한 사람이었다. 스물넷의 나이답지 않게 점잖았고 행동이 깔끔하여 노인들까지 입을 모아 이 전도사야 말로 은혜를 받아 변화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과격하지 않았고 이적과 기사에 대해서 남들처럼 체험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빨래거리도 혼자 해결했고 화내는 법이 없었으며 아이들을 무척 귀여워했다. 완벽에 가까운 젊은이가 전도사였으니 의심이 많고 성격이 대쪽 같은 어머님도 전도관이 기성교회에서 지탄하는 사교집단 이라고 믿지 않게 되었다. 도리어 기성교회가 썩어서 구원이 없고 전도관 만이 구원이 있다고 믿게끔 되었다. 이 전도사는 개척제단을 지으려고 왔지만 중간에 홍 집사라는 신도를 잘못만나서 가지고 온 돈으로 홍 집사네 식구들을 먹여살리다보니 돈이 깡그리 없어졌다. 제단신축은 중단 될 수 밖에 없었다. 성내3동에 있었던 우리 집은 집이 두 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한 채는 전에 살던 집에서 베틀공장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15평정도 되는 빈방이 있었다. 지금도 풍기는 인견을 짜는 직조공장이 많지만 그 당시는 베 짜는 처녀들이 베틀위에 올라앉아 손과 발로 베를 짜는 가내공장이 많았다. 갈 곳이 없는 제단은 우리 집으로 옮겨졌고 그때부터 우리 집은 항상 잔치 집 같이 떠들썩하고 분주했다. 신도들은 30~40명 정도였으나 일주일에 새벽예배, 삼일예배, 일요 낮 밤예배 모두 합쳐서 10번이상의 예배를 보는데다가 신도들이 읍으로부터 10리이상 떨어진 골짜기에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예배 끝나는 대로 가지 않고 방에 들어와서 쉬었다 가거나 잠자고 갈 때가 많았다. 남과 섞여 지내기를 싫어하고 말이 적었던 나는 많은 사람들이 방에 들락거려 이를 옮겨놓고 가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으나 마음대로 불평할 수 도 없었다. 불평을 하면 죄 짓는 셈이 되니 속으로 삭여야 했다. 극성스런 이모는 읍에서 10리 이상 떨어진 용천동 골짜기에서 내려와 새벽 4시반에 보는예배에 참석하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올라가곤 했다. 외할머니는 애들 밥은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늑장을 부리느냐고 성화였지만 이모는 신들린 사람처럼 가정 일 보다는 믿는 일에 열성이었다. 한낮에 여자혼자 걸어가기도 무서운 산골길을 밤 12시도 좋고 새벽 3시도 좋고 오르내리니 주위에선 과연 은혜의 힘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라고 감탄했다. 전도관의 교리는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았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피가 더러워지니 먹으면 안 되고 복숭아는 이브와 아담이 따먹은 선악과 이므로 먹어서는 안 되었다. 복숭아와 씨가 비슷한 살구, 자두, 앵두까지 먹지 말라고 하였다. 그밖에도 물갈퀴가 있는 짐승, 비늘이 없는 물고기 등으로 구약성서 어디엔가 기록되어 있는 먹지 말라는 것을 먹으면 피가 더러워진다고 했다. 나는 전도관에 나가지 않게 된 후에도 그런 터부가 몸에 배어 1973년 여름에 처음으로 복숭아를 새로 먹기 시작했는데 먹으면서도 이상한 무엇 혹시 배가 아프지나 않을까하는 감을 느낄 정도였다. 라디오의 연속극이나 대중가요를 들어도 안 되고 신문의 좋지 못한 기사를 보거나 영화를 보아도 죄가 되었다. 연애소설을 읽거나 바둑을 두거나 민요를 부르는 것 까지 죄가 되었다. 쾌락을 얻는 모든 것들을 죄악시했다. 오직 골고다 산상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의 고통을 생각하며 주님만을 위해서 일 해야 하고 영모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구원 받을수 있는 유일의 방법이라고 신도들은 철두철미하게 믿고 있었다. 전도관 신도들은 세상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기게 되고 오직 말세에 세워지는 천년성의 왕 자격을 얻기에 분투하였다. 박 씨는 의인의 수가 144000이 되면 천년성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천년성은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없고 길은 황금으로 되었으며 수고하지 않고도 이슬 같은 만나를 먹으며 노래만 부르고 살 수 있는 낙원이라고 하였다. 천년성이 불교의 극락과 다른 것은 극락이 죽어서 가는데 라면 천년성은 산 사람이 죽지 않고 들어가서 영생 복락 하는 곳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죽지 않고 영생한다는 데는 긴가 민가 하면서도 남들처럼 천년성의 왕이 되기 위하여 전도사를 모시는 등 주님사업에 힘쓰게 되었으며 어려운 살림에서나마 1년에 몇 번 지내던 명절을 전혀 쇠지 않게 되었다. 명절은 모두 마귀가 좋아하는 날로 마귀를 섬기는 사람들이나 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명절뿐 아니라 식구들의 생일도 전혀 차리지 않았다. 예수님 생일과 함께 지내는 일이 은혜스럽다고 하여 1년에 단 한번 명절 겸 생일인 크리스마스를 가장 성스러운 축복일로 지냈다. 나는 15년이 넘게 생일이라는 단어에 무감각하게 지내면서 그만 정확한 생일까지 잊어버렸다. 엄마에게 물어보았지만 “글쎄다. 하도 분주하게 살다보니 나도 모르겠구나. 언제 창락(풍기) 가거든 할머니께 물어봐라”고 하실 정도였다. 금지의 효과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관람을 갈 때면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혼자 빠지곤 하였다. 바로 죄짓기 싫어서였다. 대학 1학년 때까지 영화라고는 전도관에 나가기 전에 본 ‘쌍무지개 뜨는 언덕’과 ‘춘향전’뿐이었다. 문학책을 읽다가도 연애하는 내용이 나오면 덮어버렸다. 소녀시절을 그런 식으로 보냈으니 지금까지 명절이나 생일이 다가와도 기쁘고 즐거운 설레 임 이 없는 맹 맛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2>편에 계속 <저작권자 ⓒ 국제기독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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