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宗敎 集團에서의 人生流轉<8>

제18회 300만원 稿料 논픽션 優秀作

류재복 기자 | 기사입력 2015/12/18 [20:34]

어느 宗敎 集團에서의 人生流轉<8>

제18회 300만원 稿料 논픽션 優秀作

류재복 기자 | 입력 : 2015/12/18 [20:34]



                                               陳 英 恩

 

      亂脈相의 學校運營
박대통령의 특명으로 1978년부터 산업체 근로자들을 위한 산업체 부설학교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기업은 의무적으로 설립하도록 되어있고 설립하지 못한 경우 가까운 산업체 특별학교에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시온합섬은 원래 성경에 나오는 ZION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전도관 으로 봐서는 유서가 깊은 이름인데 78년 6월에 三光으로 바뀌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박 씨의 아들 동명, 경명, 윤명을 모두 일컬어 삼광이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시온합섬 부설중학교는 원래부터 설립자가 사회사업에 뜻이 있어 세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학교가 없으면 학생을 특별학교에 보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종업원들을 일찍 퇴근시켜야 되므로 울며 겨자 먹기로 세운 것이다. 설립자는 박윤명으로 되어 있었지만 신앙촌의 전권은 박태선씨 에게 있었고 학교 운영도 박 씨가 관계하였다. 그러나 학교부실운영은 교육청 장학사들이 “시온하면 말도하기 싫다”고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교장을 세우라고 하니 제대로 세우길 하나. 교사 정수 5명을 채워놓으라고 아무리 성화를 해도 그냥 있으니 어디에서 서류라도 갖다가 채우라고 편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특수지역인 신앙촌인데다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으니 올 선생도 없었고 회사에서도 채용할 생각이 없었다. 교사로는 대리석 공장에서 근무하던 서현수(가명)선생이 사회를 맡았고 부산대학병원의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현숙(가명)선생이 영어를 맡았다.



정년퇴직한 70세가 넘으신 배정삼 선생께서 음악과 도덕을 가르쳤다. 나는 과학과 가정을 담당하였고 박일남(가명)선생은 전에 농구코치를 한 운동선수 출신으로 체육을 가르쳤다. 국어는 기장중학교의 국어선생이 임시로 강사로 나와서 가르쳤다. 부족교사를 채워 놓으라는 독촉이 심하니 서류상으로는 남의 자격증을 갖다가 사람이 있는것 처럼 해놓고 실제로 사람은 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없는 과목은 모두 시온합섬에 근무하고 있는 무자격 강사가 가르쳤다. 서류상으로는 학교운영비가 몇 천만원이 책정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돈이 필요할 때는 필요한 액수만큼 기안을 올려 박태선 씨의 결재가 나야했다. 그나 빠르면 보름, 늦으면 한 달이 걸렸으므로 학교운영은 무척 어려웠다. 시온합섬에는 전결이란 것이 없는것 같이 보였다.



더욱 놀란 것은 결혼하는데도 영모님의 결재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제는 결혼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하더니 박 씨의 전처가 죽어 그가 재혼하게 되자 노처녀들에게 결혼을 권장하여 신앙촌내에 아담한 예식장까지 꾸며 놓았다. 결혼식장에 갔다 온 사람들조차 마귀들이라고 흉보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결혼은 남자는 23세 이상, 여자는 27세 이상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못을 박아놓았고 그 나이에 찬 사람들이라야 결재를 올릴 수가 있었다. 나이가 안되면 결혼할 수 없느냐고 하였더니 결재를 안올리면 신앙촌 밖에 나가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 여자들의 나이를 27세로 제한해 놓은것은 신앙촌에는 노처녀들이 많아 그렇게 나이를 제한하지 않으면 나이어린 여자들이 먼저 시집가는 바람에 노처녀들이 시집갈 수 없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하였다. 시집 안가고 사는 것이 은혜스럽다고 독신생활을 장려하더니 이제는 결혼 결재권까지 행사를 했다.



     고달픈 어른 학생들

산업체 부설학교는 원래 오후 5시 30분에 수업을 시작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온합섬에서 학생들을 일찍 퇴근 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종업원과 다름없이 7시에 퇴근을 했다. 학교는 7시 30분에 시작하였다. 30분 동안 밥 먹고 준비해서 학교에 도착 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정시에 체크를 하면 태반이 지각이었다. 학급은 모두 1학급이었다. 처음에는 70여명이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 내가 처음 근무하던 5월 24일에는 60명도 안되었다.



학생들은 4시에 일어나 새벽예배에 참석한 뒤 종일 공장에서 일하고 다시 밤 11시까지 수업을 받아야 했기에 건강상태가 좋지를 않았다. 학교를 그만둔 학생 거의가 건강상의 이유였다. 그렇게 힘든 공부를 하는데도 학생들은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어쩔 줄 몰랐다. 중학 1년을 중퇴하고 들어와서 10년이 넘었다는 한기숙 양은 학교가 세워진다는 소문을 듣고 너무 기뻐서 매일 학교에서 공부하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어른 학생들이 감격해서 울었다고 말했다. 학생들 간에는 과로에 지쳐 아픈 학생들이 많았다. 힘이 없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을 대하면 코끝이 찡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인정이 많은 배정삼 선생은 “이러다간 학생들이 졸업도 하기 전에 병들어요. 청소를 못하더라도 일찍 보내야 한다”고 늘 주장을 했다.



학생들의 연령은 13세부터 36세까지였고 대부분 20세가 넘은 학생들이었다. 늙은 학생이 바다를 바로 코 앞에 두고도 “선생님, 해초가 뭐예요?”라고 질문을 하고 “神話가 무슨 말이죠?”라는 질문을 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그들의 질문은 그간의 생활이 얼마나 단순했던가를 잘 증명했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죤을 접할 기회도 없었고 어렸을 때부터 오직 믿는 일에만 충성을 다하였으니 설교시간에 들은 것 빼고는 아는 것이 빈약할 수 밖에 없었다.



차츰차츰 결석생이 많아졌다. 연중 결석생 없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축복일 전후에는 결석생이 무더기로 나왔다. 축복일에는 물건(시온상품)이 많이 나가기 때문에 그 생산량을 충족하기 위해 학생들이 과외로 일을 해야 했다. 어느 축복일에는 결석생이 16명이나 되었다. 나는 화가 머리 끝 까지 나서 나온 학생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숙소의 열쇠를 지방에서 온 어느 전도사가 가지고 나가서 교복과 책가방을 꺼낼 수가 없어 결석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혼한 남편에게 중1년생 딸을 맡긴 우영자씨는 36살의 나이에 교복을 입고 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였다. 그 정성을 보면 성적결과야 어떻든 간에 머리가 숙여지곤 했다. 학생들은 워낙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무척 하려고 노력하였다. 수업시간에 떠들지 말라는 얘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에 대한 태도 또한 극진하여 일반학교와는 다른 무엇을 느끼게 하는 보람이 있었다.



그해 8월에 경상남도의 중고교에 근무하는 여교사 240여명이 울산에서 새마을 교육을 받았는데 내가 산업체부설 중학교에 근무한다고 해서 많은 선생님들 앞에서 시온합섬 부설중학교에 대해서 10분간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학생들의 진지한 열의와 그들이 안고 있는 어려움과 함께 이난우 라는 학생에 대한 얘기를 하였다.



내 얘기를 듣고 어떤 이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모습도 보였다. 내가 얘기를 끝내고 단에서 내려오자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서 자신도 그런 곳에 자원해서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여서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학교 운영상의 치부는 조금도 말하지 않아서 선생님들이 좋게만 받아들인 셈이었다. 이난우는 18세로 키가 크고 눈이 큰 남학생으로 착실하게 학교에 다녔는데 아프다는 전달과 함께 결석이 계속 되었다. 그의 친구에게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물어보니 지난 학력 고사 때 밤을 새워 공부를 했다가 그때부터 탈이 난 것 같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난우는 틈만 있으면 책을 붙들고 있다고 했다.



의무실에 입원을 했다고 하여 찾아갔더니 그는 생수치료를 받고 있었다. 생수치료를 받으니까 곧 나을 수 있다며 밝은 표정이었다. 그는 아파서 뼈만 앙상한데도 새벽예배는 꼭 참석을 했다. 병은 쉽게 낫지 않았고 결석이 계속 되었다. 나는 그의 친구를 불러 건강이 중요하니 공부는 아주 잊어버리고 휴학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난우는 꼭 나아서 나갈테니 제발 휴학만은 시키지 말아달라고 했다. 나는 마음이 괴로웠지만 결석이 두 달 가까이 계속되어 휴학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계속 생수치료만 받았다. 병은 점점 악화되었다. 이제는 의무실에서도 병원으로 가보라고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난우는 절대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김현숙 선생과 함께 설득하여 부산대학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러나 그는 입원 몇 일 만에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는 신앙촌으로 되돌아오는 차 안에서 피를 쏟고 죽으면서 똑똑한 말소리로 “내가 죽으면 책이랑 모자랑 함께 넣어 달라”고 했다.



공부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아이에게 나는 너무도 냉혹했다. 그를 휴학 시킨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었다. 그의 장례식에 가서 하관 하는것 부터 무덤에 묻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밤에 수업이 끝나고도 수예부 아이들은 공장에 또 일하러 가는 때가 많았다. 내가 학생들이 너무 가엾다고 하였더니 한 학생이 “선생님, 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예요. 기장신앙촌 초기에는 밤 12시전에 일 끝나본 적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9>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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