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宗敎 集團에서의 人生流轉<4>

제18회 300만원 稿料 논픽션 優秀作

류재복 기자 | 기사입력 2015/10/24 [19:21]

어느 宗敎 集團에서의 人生流轉<4>

제18회 300만원 稿料 논픽션 優秀作

류재복 기자 | 입력 : 2015/10/24 [19:21]




                                                      陳 英 恩

                                사랑이 없는 사회

전도관 에는 특유한 은어들이 많았다. 내용을 풀이해 보면 ▲쌩퉁이-제단에는 나가나 믿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건성으로 나가고 믿음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 ▲마귀 역사한다-전도관이나 신앙촌에 대해 반발하고 비난해서 하나님의 사업을 가로막는 행동을 한다. ▲역사꾸러기-전도관과 신앙촌을 헐뜯고 핍박하거나 전도관에 다니다가 떨어져나가 전도관에 대해 반대가 심한 사람 ▲열심쟁이, 은혜파-열심히 믿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바치는 신도 ▲세력이 온다-사회인(불신자)과 마주 대했을 때 그 사람에게 들어있는 약령의 세력이 와서 머리가 아프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특히 전도관을 반대하거나 죄가 많은 사람을 대할수록 세력이 크게 온다고 한다.




▲씌운다-사회인, 기성교인, 병자 등의 악령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마귀세력이 덮어 씌운다는 뜻. 신도들은 씌우지 않으려고 불신자와 함께 식사나 잠자는 것을 피하는 일들이 예사였다. 특히 소비조합원들은 매일 밖에 나가서 사회인과 접촉하니 씌일 우려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영모님께서 특히 기억하셔서 씌운 것을 벗겨주시니 영모님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거짓목사-전도관 이외의 교회에서 일하는 목사, 전도사, 선교사 등 ▲핀다-시체에 생수를 바르고 예배를 보면 빳빳한 시체가 피어난다. 또는 은혜를 받아 얼굴모습이 환해진다고 하였다.




▲쫓겨난다-신앙촌에 살면서 영모님 말씀을 불순종하여 죄를 짓는 경우 영모님 명령으로 밖으로 쫓겨난다.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것도 쫓아낼 죄목이 된다. ▲천부장-영모님 명을 받들어 신앙촌 전체를 통솔하는 장으로 영모님이 임명과 해임을 맘대로 하였다. 소사, 덕소, 기장 신앙촌의 천부장은 대대로 모두 여자였고 권세가 컸다. ▲백부장, 오십부장-천부장 밑에 백부사무실이 있었다. 백부장은 백부를 감시하고 영모님의 지시를 집집마다 전하는 일을 하였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이라는 단어는 모두 구약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사람들이 극성스럽게 믿는데 비한다면 실제로 언행면 에서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소사 신앙촌의 5만 제단에서 흔히 겪는 일중에 이런 것이 있다. 신도들은 영모님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앉아 은혜를 받겠다며 아침을 일찍 해 먹고 입구에 줄을 지어 앉았다가 문을 열면 단상을 향해 뜀박질 해갔다. 은혜 받는데는 양보고 질서고 없었다. 옆 사람과 다투고 상스러운 말을 지껄이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씌우고 어쩌고 하다 보니 이웃사람도 경계하게 되었다. 죄를 보고도 눈감아주면 죄를 지은 사람과 똑같다고 하여 남의 비행을 고발하였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하였는데 신앙촌에는 사랑이 없었다. 성경에 믿음과 행함이 일치해야 한다고 했는데 열심쟁이 라고 해서 안 믿는 사람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느냐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사람을 보고 믿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며 오직 이긴 자 감람나무 한분만 보고 믿어야 한다”고 했다. 여러 가지로 불만이 많았지만 이 길이 참 길이라는 것은 고교 졸업 때 까지 변함이 없었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고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들은 여자 건설대원들이었다. 주님사업을 위해 머리카락이 노랗게 바래도록 땡볕에서 일하는 순박한 처녀들이야말로 천년성의 왕 자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앙촌에서의 주제는 영모님에 대한 것, 죄, 은혜, 성신, 마귀, 축복, 안수, 안찰, 생수, 주님사업(장사 잘해서 물건 많이 파는 일과 많이 바치는 일)과 같은 유형이었다. 분위기가 그렇게 된 것은 영모님 박태선 씨의 설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모님에 대한 숭배는 옛날의 황제에 대한 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황제한테는 속으로는 싫어도 겉으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영모님에 대한 경우는 성도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충심으로 우러나온 숭배였다. 70~80세의 할머니들도 엄마, 엄마 하면서 기도할 정도였다. 예배를 마친 후 그가 5만 제단 뒷문으로 나와서 승용차에 올라 떠나갈 때면 그의 얼굴과 한번이라도 마주치려고 또는 옷깃을 만져보려고 열망하는 사람들이 가득 찼다. 그의 승용차가 떠나는 한길 양편에는 신도들이 줄을 서서 허리를 90도 가까이 굽혀 절을 했다. 영모님은 환송하는 신도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고 그 뒤를 몇 대의 호위차가 뒤따랐다.

 

                              오빠의 入院

언니가 신앙촌에 들어오기 전부터 오빠는 사범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가정교사 생활을 하다말다 하는 불규칙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3형제가 모두 신앙촌에 있게 되자 오빠도 함께 들어와 살게 되었다. 언니는 오빠와 어머니의 설득으로 공장을 그만두고 시온고등학교 2학년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학생인 오빠는 얼마간의 용돈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세상물정에 어두워 오빠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언니와 나도 오빠의 용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가 매달 풍기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는 언니가 주관했는데 겨우 겨우 살아갈 정도였다.




언니는 생활비가 부족한 게 뻔한데도 언제나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사실 어머니의 봉급으로 넷이 학교에 다니고 전도관을 운영하려면 경제적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어머니는 평생 얼굴에 분 한번 안 바르고 10년가야 새 옷 한번 안해 입고 살아온 처지였는데 전도관 살림까지 맡아 했으니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오빠의 경제적 고통은 심했던 것 같다. 자신이 벌 능력이 없는데다가 어머니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차비가 없어 오류동에서 신앙촌까지 걸어왔다. 게다가 내성적인 성격의 오빠는 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털어놓지 못했다.




오빠는 박태선시를 의인으로 믿지 않았다. 전도관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말을 비치지 않았다. 싫으나 좋으나 제단에도 꼬박꼬박 나가야 했다. 오빠는 속으로만 고민했다. 잠 못자는 밤이 많아지고 행동에 이상이 생겼지만 언니와 나는 눈치를 못 챘다. 나중에 안 일 이지만 오빠는 박태선 씨에 관하여 계속 메모를 남기고 있었다. 그는 식구들이 전도관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말을 하지 못했다. 오빠의 노이로제 증상은 어머니까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방이 좁아서 그런지 모른다며 D동보다 좀 넓은 CD39동 5호실로 이사를 했다.




1964년에 75,000원을 주고 샀는데 집을 사기위해 풍기 창락동에 있던 밭 몇 마지기를 팔아야 했다. 시골집과 밭은 어머니의 전 재산이었다. 64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방에 누워있는데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며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웬 남자가 손에 피범벅이 된 오빠를 붙들고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낯선 남자는 택시운전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빠가 아무 이유 없이 택시유리창을 주먹으로 쳐서 깼다는 것이었다. 오빠는 어려서부터 남과 싸움한번 못해보고 자랄 정도로 순한 사람이었다. 제정신으로는 그럴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때 언니와 나는 하도 혼이 나가서 어떻게 사건을 수습했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풍기로 전보를 쳤다. 어머니는 넋이 나간 채 올라왔고 오빠는 서울대학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때부터 집안은 늘 어두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었고 우리들은 웃음을 잃었다. 오빠는 몇 달 치료받고 퇴원했으나 재발하여 다시 입원했다. 오빠의 병 때문에 어머니는 몇 십년을 한 번에 늙은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봉헌국민학교의 교감 직을 그만두고 경기도 화성에 있는 화수국민학교로 옮기셨다. 옮긴지 1년이 못되어 시온학교에 자리가 나 공립학교를 아주 퇴직해 버리고 시온학교로 옮기셨다. 퇴직금 6만여원은 오빠의 입원비로 썼다. 오빠를 그렇게 만든 책임은 가족에게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모든 것을 마귀의 시험으로 여기고 더욱 열심히 믿었다. 오빠는 지금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약을 복용하고 있다.

      

                                 빈대 騷動

어머니가 올라오기 전에 3형제가 3일을 보리쌀만 삶아먹고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니는 어머니에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오셨을 때 내가 오바 좀 사줬으면 좋겠다고 하면 언니가 곁에서 “오바는 무슨 오바야 이제 겨울이 다 갔는데...”하고 말을 받았다. 나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내려가신 후엔 “넌 엄마 고생 하는거 모르니? 왜 자꾸 돈 쓸려고 그래”하면서 구박을 주었다.




언니는 언제나 헌 교복을 사 입었고 그것을 내가 물려받았다. 그러다보니 6년 동안 한번도 새 교복을 입어보지 못했다. 동복 윗도리의 색깔이 바래서 그걸 뒤집어 새로 만들어 입느라고 재봉틀 앞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전도관 에서는 믿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게다가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계속 드리우니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학교에서도 집안의 이것저것을 생각하다보면 공부는 딴전이 되기 십상이었다.




CD39동에 살면서 두 번 크게 혼 난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풍기에서 올라오기 전이었다. 안성에서 이사 온 옆집 4호실이 빈대를 이사짐과 함께 옮긴 모양이었다. 이사 온지 몇 일 뒤에 보니까 그 집 식구들이 빈대 잡는 농약을 치고 종일 밖에 있었다. 다음날 즉시 옆집 빈데떼 들이 천장과 다락을 통해 우리집 으로 몰려왔다. 신앙촌 집이 다 그렇듯이 1호실에서 6호실까지 모두 통해 있어서 그런 빈대의 이동사건이 생긴 것이다.




한 두 마리가 아니라 워낙 수가 많아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오빠가 병원에 있어 모두 마음이 상해있는데다 빈대까지 속을 썩였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일어나면 빈대에 물린 자리가 수두룩 하였다. 신앙촌에는 약국이 없어서 소사읍내에 가서 빈대 약을 사 왔는데 옆집에서 농약처리를 해서인지 시시한 약 가지고는 끄떡하지도 않았다. 빈대소동이 그치자 그 다음에는 옴 소동이 생겼다. 풍기제단에 임 청년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제단에 계속 나오게 되었는데 그가 옴을 앓고 있는 것을 모르는 신도들이 주의를 하지 않아 신도들 전체가 옴에 걸리고 말았다.




그 즈음에 이종사촌 정순언니가 신앙촌 우리 집에 왔다. 우리는 소문으로 풍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언니 혹시 옴 오른거 아냐?” 했더니 “다른 사람은 다 올랐는데 나는 괜찮아” 했다. 우리는 그전까지 옴에 대해 말만 들었지 어떻게 옴을 앓게 되는지조차 몰랐던 터였다. 옴이 안 올랐다기에 안심하고 하룻밤을 함께 잤는데 언니가 내려간 후 즉시 옴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 몸이 근질거려서 목욕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셋이 다 옴에 걸렸으니 큰 일 이었다. 집에서는 마음대로 긁을 수나 있지만 학교에 가서 참으려니 죽을 지경이었다. 약 쓰는 게 나쁘다고 했지만 견디다 못해 약을 구해 발라보았으나 쉽게 낫지 않았다. 계속 약을 발랐어야 하는데 약을 몇 번씩이나 살 돈이 없어서 그대로 낫기만을 기다렸다. 11월에서부터 다음해 여름이 되기까지 옴과 싸웠던 것이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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