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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나이에 신앙촌 간 여동생 48년간 행방불명, 죽었나? 살았나?”
“내 동생을 찾습니다” 70대 언니의 눈물어린 호소
 
류재복기자 기사입력  2014/11/13 [16:29]

▲     © 류재복

    “17세 나이에 신앙촌 간 여동생
             48년간 행방불명, 죽었나? 살았나?”


              “내 동생을 찾습니다” 70대 언니의 눈물어린 호소
             호적에는 원인불명의 제적에 주민등록 자체가 없어

[류재복 대기자]

충북 괴산에서 살고 있는 70대의 한 여인이 “나의 친 여동생이 17세의 어린 나이에 신앙촌에서 들어갔는데 근 50년이 되어가는 동안 생사를 알 수 없다”는 하소연의 제보를 받고 기자가 괴산 현장으로 달려 간 것은 지난 9월 24일 오전 이였다. 제보를 준 여인은 충북 괴산출신으로 금년 74세의 김 모 여인이었다. 그녀는 슬하에 두 아들을 모두 결혼시킨 후 독신으로 산골에서 살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했고 찾아갔기에 그녀는 반갑게 기자를 맞아주었다. 기자역시 충청도가 고향이지만 김 여인도 충청도 괴산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70년 이상을 살면서 자신의 실책으로 동생을 신앙촌에 보내놓고 생사를 모른 채 살아오고 또 남편과도 사별을 한 후 파란 많은 삶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래도 고생을 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박태선 장로가 부천 소사에서 신앙촌을 건설하고 집회설교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전국의 신도들을 휘어잡고 있을 때 김 여인 역시 박태선의 설교에 빠져들면서 자신이 태어난 고향마을 인접의 가까운 산에 들어가 밤에 몰래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어 마을로 띄운 후 양잿물에 나무껍질을 벗겨 스스로 전도관을 지어 신앙촌에 바칠 만큼 광신도가 되면서 마을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충성을 보였다. 

이때 남편인 조 모(작고)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결혼 후 신앙촌생활에 몰두를 했으며 이 때문에 남편 조 모 씨도 박태선에게 잘 보여 신앙촌의 목사격인 전도관 관장의 직분을 갖고 경기도와 인천지역의 양곡, 박촌, 백마장, 역곡, 숭의동 전도관 관장을 지내면서 부부가 열심히 영모라고 부르는 박태선 에게 오직 충성을 했다.

그리고 이때 김 여인은 자신의 친 여동생 즉, 1949년생의 어린동생 김옥분(당시 17세)을 신앙촌에 입소케 하여 부산 기장으로 보냈다. 언니를 따라 전도관에 다니던 동생이다 보니 자연 언니의 신도생활에 영향을 받아 오직 신앙촌에서만이 생활 해야 행복하고 구원을 받는다는 마음에 열심히 불철주야 신앙촌 공장에서 죽도록 일을 했다, 

               동생을 신앙촌에 보낸 죄책감, 오랜세월 고통속 못잊어
                      소식이 없는 것 보면 이미 죽었는지도 몰라

그러다 그 후 동생 옥분이 언니가 사는 고향엘 왔는데 너무도 몰라보게 바싹 마른 몰골의 동생모습에 언니인 김 여인은 깜짝 놀랬다. 원인은 영양부족이었다.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온갖 작업일에 몰두했던 결과였다. 이에 언니는 열심히 동생을 위해 몸 보심의 음식을 먹이면서 얼마동안 데리고 있자 동생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고 동생은 다시 부산 기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그 뒤로 예쁘고도 고운 자신의 동생 옥분이가 몇 년간 집에 오지도 않고 소식이 없어 직접 부산 기장의 신앙촌을 찾아갔지만 동생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동생의 행방에 대하여 물어보았지만 모두가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 후 언니인 김 여인은 생사불명의 애태움속에동생 옥분을 기다리고 있는지가 어언 50년이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동생의 행방은 더 궁금했다.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김 여인은 이날, 당시를 회상하면서 기자에서 상황을 들려주었다. “1970년경에는 부산의 신앙촌을 집중 건설하는 시기로 매우 악조건 속에서 신도들이 생활을 했습니다. 거의가 여자들이 질통을 지고 일을 했죠. 숙소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먹는 것 형편없고 말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고된 노동을 보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그러다보니 병 든 자도 많았고 영양실조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은 신도들이 많았습니다. 말이 월급이지 그 당시 사회에서는 15000원의 월급이지만 신앙촌 그곳에서는 3천원에서 6천원의 월급을 줬습니다. 6천원이 최고 많은 월급이었죠. 그런데다가 못 먹이고 일은 고되니 당연 죽은 자들이 많았죠. 아마도 내 동생 옥분이도 그때 그렇게 죽었는지 모릅니다”라며 한숨을 지었다.

김 여인은 또 “지금도 내가 아는 덕소 신앙촌에 사시는 어느 권사님 딸도 10대 때 그곳에서 일하다 죽었는데 그 당시는 거기서 처녀로 죽는 것도 복이라 할 정도로 축복받은 땅이라 했습니다. 도무지 그 당시의 신앙촌에 대하여 일반인들은 이해를 못 할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천부교 사람들이 그 당시 고생한 사람들의 수고와 공을 전혀 모르고 현재의 천부교 실세들이 구원파보다 더 못한 행동들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1980년, 박태선의 섹스안찰 받고 수 많은 여신도 자살
              묘지허가도 없는 경주시 외곽에 시신 등 유골 매장 

그 후, 1980년 초, 어느 날, 박태선이 전국의 전도관 관장 부인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상한 설교를 하고 있을 때 김 여인도 참석을 했다. 그때 박태선이 하는 설교는 “나는 하나님이다. 이제부터 나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오늘 여러분은 남편들과 모두 이혼을 하고 나에게 섹스안찰을 받아야 한다”였다. 이에 김 여인은 깜짝 놀라 이 사실을 전도관 관장인 남편 조 모 씨에게 말하자 남편은 박태선을 도태시키고 신앙촌을 새롭게 건설하는 정화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면서 反朴 활동에 들어갔다.

이 사건으로 김 여인 부부는 결국 전도관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이후부터 모진 고초와 고통을 겪었다. 그것은 그간 친척이나 지인들로부터 돈을 얻어 신앙촌에 바친 돈이 무려 당시 5천만원이 되었으니... 이후 김 여인 부부의 숱한 고생은 말할 수 도 없고 더구나 남편은 사기 누명까지 쓰게 돼 감옥에 갔다.

결국은 거액 50만원의 벌금을 물고 석방이 된 기막힌 사연을 들려주면서 “그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신앙촌의 배신과 아픔을 잊기 위해 불교로 개종, 열심히 생활하고 있지만 1980년 당시 박태선의 이단 및 변태에 대하여는 너무도 끔직 했으며 그 때 많은 관장 부인들이나 여신도들이 너무도 많이 박태선의 마수에 걸려 비참한 생을 보냈다”고 말했다.

당시 대전지역의 모 관장 부인인 김옥준은 박태선이 부른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안내원을 따라 안찰실에 들어가자 박태선이 벌거벗은 몸에 가운을 걸치고 문을 잠가놓아 결국은 성폭행을 당한 후 곧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그 당시 저도 만약 남편과 이혼을 하고 박태선에게 쎅스안찰으면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여인도 원래는 장로교 신도였다가 박태선의 설교와 교리에 빠져든 것이다. 

6남매 중 셋이 죽고 남편마저도 12년 전에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 현재는 생존 3남매가 가끔 만나면서 살고 있다는 김 여인은 현재 절인배추, 청국장, 밤과 대추를 판매하는 장사를 하면서 또순이처럼 악착같이 살고 있는데 “지금에 와서 신앙촌으로 꽃다운 나이 17세에 들어갔다가 근 50년간 소식을 모르는 동생을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는 우연히 청주에 사는 전 신앙촌신도인 어느 지인의 집에 갔다가 ‘갈라파고스수용소’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갈라파고스수용소’ 소설 보고 동생생각에 눈물 쏟아
        신앙촌에서 일하다 행불 된 여동생 누군가는 책임져야

김 여인은 그 책을 보는 순간 “그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마치 내 동생의 이야기 같아 하염없는 눈물을 쏟았으며 또 세월호 구원파 사건을 보면서 동생의 생사를 꼭 알고 싶고 만약에 죽었다면 그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보고 절대 그들을 그냥 둬서는 안되기 때문에 기자님에게 제보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 여인은 기자에게 자신의 친동생 김옥분이 제적당한 원래의 호적등본을 보여주었다. 원래 제적이란 아들이건 딸이건 결혼을 해 하나의 가정이 설립 됐을 때 법적으로 제적이 되는 것인데 김옥분은 아무런 이유와 사유도 없이 자신 가족의 호적에서 제적이 되었고 그 후에는 그 호적도 아예없어지는 기막힌 일을 당했는데 이는 관련부처에 조사를 해야 하고 만약 그들 내부의 조작이라면 마땅히 수사를 받아야 할 중대 사안이다.

김 여인은 마지막으로 “제 동생 옥분이가 열일곱살 어린 나이로 신앙촌에 갔다가 48년째 행방불명 생사를 모르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신앙촌 천부교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하고 저 또한 책임을 묻고 싶다”며 “이제는 더 이상 이단종교에 빠지는 국민들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는 김 여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얼마 전에 신앙촌을 이탈, 기자에게 제보를 해 준 신 모 여인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원래 기장 신앙촌 땅에 묻은 죽은 사람들의 묘를 다시 파서 그 유골들을 경주의 어느 산에 갖다가 그 시신의 유골들을 묻어버렸습니다. 그 산은 공원묘지로 허가도 나지 않은 곳인데도 묻었습니다. 특히 경주는 유적지로서 그곳 주민들도 담 하나도 함부로 개조를 못하는 곳인데 당연 공원묘지 허가가 날 수가 없죠”.... 라고...

그녀는 또 “더 웃기는 것은 신앙촌이 60년 전통을 자랑하고 땅이 그렇게 많은데도 억울하게 일하다 숨져간 신도들을 위한 제대로 된 공원묘지하나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김 여인이 50년간을 찾고 있는 그의 동생인 옥분이도 만약 죽었다면 그 경주 어느 산의 묘지에 이름 없이 묻혀서 구천을 맴돌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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