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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구 국방장관 내정자 '조부' 의병투쟁 의혹
[인터뷰]이태룡 박사 "한민구 조부 '한봉수' 의병 잡는데 협력 일본 앞잡이"
 
추광규 기자 기사입력  2014/06/14 [05:02]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일 한민구 전 합참의장을 국방장관으로 내정하고 인사청문요청서를 5일 국회에 제출한 가운데, 한민구 국방장관 내정자 조부인 ‘한봉수’의 의병투쟁 이력에 의혹이 제기됐다.
 

최근 출간된 『한국의병사』(상.하)의 저자 이태룡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봉수’는 일진회 출신으로 의병들에게 강제로 초모된 후 활동하다, 일제에 자수하면서 의병장을 체포케 하는 조건으로 면소 처분을 받는 등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같은 공적을 세운 바 없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대한제국말 의병장으로 알려진 한봉수(1883.4.18 ~ 1972.12.25)는 ‘대한제국말기 의병으로 70여명의 왜적을 사살하는 등 활동했다.
 
의병이 해산 된 후에는 3ㆍ1 운동 때는 손병희와 밀의하고 청주에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한 공적으로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현 독립장)이 수여된 바 있다.
 
문제는 한민구 국방장관 내정자가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 시절부터 한봉수 의병장의 손자로 널리 알려져 왔었고, 이번 국방부장관 내정에도 항일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
 
또한 이태룡 박사의 문제제기에 대해 한민구 장관 내정자측은 관련 의혹을 부인하고 있고 ‘청암 한봉수 의병장 기념사업회’ 또한 친일의 대가로 석방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악의적 왜곡”이라고 반박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의병사』의 저자 이태룡 박사에게 한말 의병장으로 알려진 ‘한봉수’와 관련된 친일 의혹과 함께 한민구 장관 내정자의 주장 그리고 기념사업회 주장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태룡 박사와의 인터뷰는 11일과 12일 이틀에 걸쳐 이메일과 전화통화로 이루어졌다. 
 
'한봉수' 무적의 의병장인가? 일제 헌병대 첩자인가?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한봉수는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던 중 군대가 강제해산 되자 해산 군인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에 뛰어든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박사님의 연구에 따르면 이 같은 내용은 사실인가요?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그의 진술이 일본 경찰의 비밀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을 번역한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그는 일찍이 장사를 하면서 21세 때부터 일진회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한봉수는 일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르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고 그 공훈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이 같은 공적은 사실인가?
"한마디로 코미디라고 봅니다. 『한국독립운동사』12권 8,400여 쪽에 나타난 바와 재판기록에는 일본 군경과의 전투는 일본인 체송인(우편배달부) 공격 2차례 등 4회로 나타나 있습니다. 일본 경찰의 비밀기록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충북지방의 의병투쟁 기록 중, 의병부대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내용 포함한 것은 확대 해석한 것으로 봅니다."
 
-한봉수는 1909년 음력 8월경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인 마포로 피신하였으나 일 헌병에게 체포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 박사님의 연구에 따르면 어떻게 파악되는가요?
"한봉수는 1910년 3월 8일(기밀문서에는 3월 11일) 이미 귀순하면서 조건부 사면(赦免)을 요청했음을 일본인 내부 경무국장이 충북 경찰부장에게 알렸고, 이에 따라 일본인 영동경찰서장 일행이 한봉수와 함께 문태서 의병장 등을 체포하기 위해 10여 일 동안 전북지역을 돌아다닌 기록이 『한국독립운동사』 17권 407~410쪽에 걸쳐 비교적 자세히 나옵니다.
 
그가 그 후 경성(서울)에 갔던 것은 문태서 의병장이 서울에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일본 경찰이 비밀리 보낸 것으로 보이며, 이 사실을 몰랐던 경성의 일본 경찰이 그를 체포한 기록이 보입니다.
 
즉, 1910년 5월 16일 경성에서 한봉수를 체포했다는 것과 5월 30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 검사가 내부 경무국장 앞으로 '올해 2월 중, 내란 사건시 귀국(貴局:경무국)에 자수하여 관대한 처분을 요청하였다.'고 하는데, 그 사실 여부를 조회해 옴에 따라 6월 2일 문태서 체포 조건으로 자기 죄악을 보상하기 위해 자수했는데 이미 죄상이 분명하고, 공범자가 체포됨에 한봉수도 체포했다고 회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서울에서 체포된 것은 '문(文:문태서)은 종래 헌병대․경찰대의 조사가 엄할 때는 경성, 인천 등에 숨는 것을 상례로 하므로 지금도 혹은 같은 사례에 의하여 동 지방에 잠복하고 있을 것이다. 고로 경성을 수색하기로 하고 귀경 도중에 속리산 및 경기도 직산 부근을 조사하기로 했다.'라는 기록 등으로 보아 그는 일본 경찰에 의해 서울에 파견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일본경찰의 비밀기록에는 '폭도 수괴 한봉용(한봉수의 일명)의 실모(實母)가 2,3일 전 경성으로부터 청주군 세교리의 친척집을 방문하였는데, 친척·친구들은 주효(酒肴)를 보내며 경의를 표하는 모양으로 더욱이 부근 이민(里民)들은 한(韓)이 자수하였는데도 그 죄를 묻지 않고, 그가 현재 처(妻)를 취하여 아무 일 없는 것같이 지내고 있는 것은 한(韓)이 실로 위인(偉人)이라는 찬양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말들을 뱉고 있음. 따라서 실모(實母)에 대하여는 속히 귀경하여 당 지방(當地方)에는 당분간 출입하지 말도록 타이르는 동시에 한봉수에 대하여도 일단 타일러 두는 것이 가할 것임.'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의병투쟁에 나섰던 사람은 물론, 금품을 제공한 사람조차도 가혹한 처벌을 받던 상황에서 한봉수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잔치 분위기를 자아내는 행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 당국에서는 주의를 준 것입니다. '한봉수 실모(實母)는 당분간 원적지(原籍地)에 출입을 금지토록 배려하여 주기 바란다.'는 충북 경찰부장의 요청으로 보아 당시 한봉수는 일시 서울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1988년 발간된 한국독립운동사 한봉수 관련 자료. 한국독립운동사는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것이다. 
 
 
- 일본군경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한봉수가 귀순한 후 일본 군경에 부역 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데 이 부분을 설명해주십시오.
"그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면, 문태서 의병장을 붙잡는 데 협력하겠다고 경무국에 비밀리 서신을 보내자, 일본 경찰은 이를 받아들여 그를 앞세워 전북 무주 덕유산과 충북 속리산 등지를 10여 일 찾아 나섰지만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의병 활동을 벌였던 자에 대해서는, '부하 3명은 정춘서(鄭春西), 임석근(林石根), 이언구(李言九)이다. 나는 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 동행으로 가면 즉시 알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후 그들 중 2명은 붙잡혀 정춘서는 종신징역 후 교수형, 이정구는 종신 유배형을 받습니다.
 
이들의 체포에 대하여 한봉수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공교롭게도 한봉수가 귀순하여 영동경찰서 일본경찰에 협력할 시기에 체포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한봉수는 오양선(吳陽善)·노병대(盧炳大) 의병장 등에 대한 진술이 있고, 그들이 의병투쟁 때 숨겨둔 총기에 대하여 이를 제보하기도 하여 이를 회수하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봉수를 둘러싼 문제 가운데 그가 교수형을 받은 후 면소판결을 받게 되는 경술국치 대사령(1910.8.29.)인 것 같습니다. 먼저 대사령에서 의병장급이나 주요 활동 의병이 교수형이나 그 밖의 형의 집행을 면소 받고 풀려난 사례가 있는가요?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탄한 직후였던 1910년 9월 5일, 이른바 「경술국치 대사령」을 8월 29일자로 소급해서 발표하였다. 이른바 「칙령 325호」로 발표된 98개조에 의해 면소, 불기소, 판결집행정지로 풀려난 자는 모두 348명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면소 처분자 11명, 불기소 처분자 11명, 판결집행정지로 풀려난 자 326명이었습니다. 면소자는 내란범 2명을 제외하면 비윤리적인 성범죄자이거나 폭행범 등이고, 불기소 처분을 받은 자도 대부분 비윤리적인 성범죄자, 폭행, 장례 규정을 어긴 자였습니다.
 
판결집행정지로 풀려난 자는 그들이 말하는 경미한 죄를 범한 의병 168명, 의병 추정자 48명, 나머지는 잡범 132명입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던 의병장이나 소송 중에 있던 비중 있던 의병장은 모두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면소자 중, 내란 혐의자 2명은 한봉수와 박득용(유형 5년)뿐이었습니다. 일제가 겉으로는 98개조로 된 「칙령 325호」의 ‘대사령’을 발표하여 마치 경술국치 때 대사면을 한 것처럼 떠벌였으나 실제로는 사소한 범죄자나 과거 의병 활동자 중 자수한 자들을 중심으로 사면 대상자를 선별했던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가혹한 공격으로 인해 더 이상 의병투쟁을 할 수 없었던 1909년 말부터는 수많은 의병, 의병장들이 투항하는 형식으로 자수를 했지만, 대사령을 받지 못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판결문에 「칙령 제325조」를 운운하면서도 의병이나 의병장에게 적용된 죄목이었던 ‘모살죄(謀殺罪)’, ‘강도죄’는 「칙령 제325조」 98개 조항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부왜인(附倭人) 이완용이 이른바 ‘일한합방안’에 도장을 찍은 다음날인 1910년 8월 23일 호남의병장 전해산(全海山)의 교수형 집행이 있었고, 경술국치 직후에는 신대룡(申大龍), 김병주(金炳柱), 오성술(吳成述), 심남일(沈南一), 강무경(姜武景), 장인초(張仁初), 이세창(李世昌)(1909년 9월 자수) 등의 의병장에 대한 교수형 집행이 5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봉수가 면소 판결을 받게 된 경위는 어떻게 파악되고 있는가요?
"30년째 의병연구를 해 오면서 잘못된 기록들이 많음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광복 직후 구전되던 내용과 실제가 다른 경우였습니다. 특히 충북과 전북 의병에 대한 기록의 잘못이 많았습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른바 「경술국치 대사령」에 의해 면소처분을 받은 자는 단 2명뿐이었습니다.
 
한봉수가 우편배달부 2명과 호송 경호를 맡았던 일본군 상등병을 처단했기에 1심 궐석재판에서 당연히 교수형을 받았지만, 그 후 일본경찰에 자신의 구명을 조건으로 의병장을 붙잡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서신을 보내서 협상하고, 일본경찰은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비록 문태서 의병장 체포는 하지 못했지만,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협력이 있었기에 동료 의병장과 의병들이 체포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의 공로를 인정하여 ‘칙령 325호’ 예외 조항인 ‘강도 모살죄’를 범하고도 면소 판결을 받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기념사업회에서도 이 박사님의 연구를 부정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한봉수가 3.1만세의거와 관련 1년형의 옥고를 치렀다며 위장귀순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봉수에 대해서는 3.1운동 때문에 옥고를 치렀다는 그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독립운동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봉수가 10년 앞을 내다보고 위장 자수를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일본경찰과 사법 당국은 일제에 적극 협력자가 아닌 경우는 모두 처벌했습니다.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전국적으로 수천 명의 의병(의병장 포함)이 자수 형식으로 투항을 했지만, 단순 가담자는 형벌의 경감이 주어졌지만, 의병장이나 일본 군경이나 일본인을 살해한 자는 예외없이 교수형을 받게 하였습니다.
 
한봉수는 비록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의병장이었지만, 2명의 우편배달부와 일본군 상등병 1명을 사살한 죄가 있었기에 1심에서 교수형을 받았지만, 경성공소원(오늘날 서울고등법원)에서 면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3.1만세의거 때는 7,509명이 순국하고, 투옥된 자가 4만6,948명이나 되었습니다.
 
한봉수가 1년 징역형을 받은 것은 따로 그 공로를 인정해야 하겠지요. 1년형의 옥고는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에 해당하는 것이지,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니, 이는 평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한민구 내정자는 “실제 의병장 문태서가 체포된 것은 한봉수 의병장이 옥고를 치른 뒤 1년이 지난 1911년 8월”이라며 한봉수의 자수와 문태서의 체포는 무관한 일이라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념사업회에서도 “한봉수는 2010년 6월 29일 공주재판소 청주지부에서 교수형, 경성공소원에서 15년 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며 ”한봉수의 자수가 일제에 도움이 됐다면 이런 판결을 내릴 리 만무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기념사업회는 “한봉수는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강제 병합을 단행하며 옥중에 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사면 조치하여 석방할 때 같이 풀려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친일의 대가로 석방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악의적 왜곡”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반박하고 싶으신지.
"충북대 박걸순(1996)은 '한봉수가 귀순을 출원하며 무주지방을 근거로 전북과 충북 일원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장 문태서의 체포를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것으로 이는 신중한 해석이 요망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사실은 문태서는 한봉수가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도 체포되지 않고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볼 때 한봉수가 문태서의 체포를 자수의 조건으로 제의하였다는 것은 일제의 간교한 의병 이간책이거나, 한봉수의 심리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봉수는 재판 과정 중 잠시 옥고를 치른 적이 있었을지 몰라도 형벌로써 옥고를 치른 적이 없었고, 문태서를 못 잡았다고 해서 그것을 일제의 의병 이간책이나 한봉수의 심리전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한봉수는 1910년 3월 8일(기밀문서에는 3월 11일) 이미 귀순하면서 조건부 사면(赦免)을 요청했음을 내부 경무국장이 충북 경찰부장에게 알렸고, 이에 따라 일본인 영동경찰서장 일행이 한봉수와 함께 문태서 의병장을 체포하기 위해 10여 일 동안 전북지역을 돌아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봉수는 경성공소원 재판기록(『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의병항쟁재판기록」 393쪽)에는 면소 처분을 받았지, 15년 유형을 받은 사실은 없습니다."
 
-끝을 하고 싶으신 말씀은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끈 한봉수가 두 차례 우편배달부 2명과 호송을 맡았던 일본군 상등병 1명을 저격한 일은 존경받아야 할 의병투쟁이었습니다. 그 후 당시 함께 했던 의병들이 붙잡히게 되어 그의 행적이 일본경찰에 알려졌습니다. 그는 붙잡히지 않아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받게 되자, 자신의 구명을 조건으로 일본경찰과 협상을 벌인 것이 분명한데도 이를 왜곡하는 것에 대하여 그 잘못을 지적한 것이지, 한 개인을 폄훼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 차원의 포상제도는 지난 1962년 이른바 ‘재건국민회의’가 6·25 전상자를 위한 ‘군사원호법’을 제정하면서 시작되었는데, 2014년 6월 현재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자는 1만 7천 7백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건국공로훈장 중장·복장·단장으로 구분하여 3등급으로 훈장을 수여하던 것을 4등급(애국장), 5등급(애족장)으로까지 확대했고, 6등급으로 건국포장, 7등급으로 대통령표창으로 세분화했다. 이를 심사하기 위해서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독립유공자에 대한 첫 정부포상이 실시된 1962년의 당시 문교부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위원회 위원 7명(위원장 포함) 중에는 신석호(申奭鎬), 이병도(李丙燾)가 있었고, 다음해에는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22명 중 고재욱(高在旭), 신석호, 유광렬(柳光烈), 이갑성(李甲成) 등 4명의 부왜인(附倭人)(‘친일파’란 용어 부적절함)이 끼었다.
 
1968년에는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역시 위원 21명 중 고재욱, 백낙준(白樂濬), 신석호, 유광렬, 이병도, 이선근(李瑄根), 홍종인(洪鐘仁) 등 7명의 부왜인이 들어 있었습니다.
 
일찍이 부왜인 연구에 심혈을 쏟은 고 임종국 선생을 비롯한 학자들이 수차례 이 같은 사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부왜인들에게 주어진 포상이나 자료의 불충분으로 인해 잘못 포상된 상훈에 대해 정부가 제대로 해명하지 않다가 최근 『친일인명사전』이 나온 이후 부왜인에 대한 재심사를 하여 서훈을 취소시킨 바가 있습니다만,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의병장의 경우, 의병투쟁 기록이 일제의 비밀문서인 『폭도에 관한 편책』이나 『조선 폭도사』 등이 발견되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를 번역한 책이 나오기 이전에 개인의 문집이나 구전되어 오던 내용을 바탕으로 1962~1968년 3차례 의병장에 대한 서훈이 이루어졌지만, 많은 부분에 잘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호남지역에서 의병투쟁을 크게 벌인 후 대마도에 유배형(실제 소요죄로 구금 형)을 받고 아사순국(굶어죽었다) 했다는 최익현(崔益鉉)도 실제로는 일본군경과 의병투쟁을 벌이지 않았고, 대마도에 격리 구금되어 122일 동안 있으면서 병사한 것이었는데,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중장(대한민국장)을 받았습니다.
 
경술국치 후 『조선왕조실록』 용어로 나오는 ‘갑신오적’ 중의 한 사람인 박영효는 일제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았고, 김옥균·서광범 등은 죽고 없었기에 일제로부터 그 유족들이 은사금을 받았기에 부왜인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서재필(미국 귀화명 필립 제이슨)은 건국훈장 최고훈장을 추서했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 신돌석(申乭石) 의병장도 두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반만년 동안 고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한제국 국권회복기 의병의 삶에 대하여 정리가 제대로 안 되었고, 의병이 소속 부대 의병장보다 더 훌륭한 공적으로 서훈이 이루어진 것 등, 의병 공훈과 서훈에 대하여 전면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병사(上 下) 저자 이태룡 박사는 누구?
 

경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출신으로 의병들의 가사, 통문, 격문 등을 연구하여 '의병문학'으로 국내 처음으로 학위를 받았다.
 
지난 2008년 미서훈 의병(의병장 포함) 828명의 자료를 15권의 가본(책)으로 묶어 서훈신청을 한 바 있고, 기존 98명의 의병장에 대한 서훈심사를 다시해야 한다고 하여 그 자료를 3권의 가본으로 제출한 바 있다.
 
이 박사는 중등교장 직을 3년 6개월 남기고 '한국의병사' 정리를 위해 명예퇴직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이 같은 활동으로 세계 3대 인명사전 중, 두 군데(영국 IBC, 미국ABI)에서 선정, 등재되었다.
 
2011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 등재 ‘국제 교육자’, 미국 인명정보기관(ABI) 등재 ‘21세기 위대한 지성’ , 2012년 IBC 등재 ‘세계 Top 교육자 100인’, ABI 등재 ‘세계 훌륭한 지도자 500인’으로 선정, 등재된 것.
 
현재 (사단법인) 의병정신선양중앙회 부설 의병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이태룡 박사 / E-mail : ltr19@hanmail.net
                     Cafe : http://gafe.daum.net/dmlqud
                     Blog : http://dummy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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