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사람들이 왜! 그리도 사나울까!

은퇴후에 느끼는 삶들, 기성세대 절못에 대한 인과 응보인가

조 성 | 기사입력 2011/05/04 [05:46]

요즈음 사람들이 왜! 그리도 사나울까!

은퇴후에 느끼는 삶들, 기성세대 절못에 대한 인과 응보인가

조 성 | 입력 : 2011/05/04 [05:46]
지난 해에 정년퇴직을 하고 일년 쯤을 대안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보냈다. 그 동안 40여년 가까이 금융기관에서 지내다가 퇴직을 하고 사회생활을 해 보니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를 않았다. 사회에 대하여 몰랐던 새로운 느낀 점들이 너무 많았고 내가 그 동안 온실에서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느끼는 점은 사람들이 사납고 거칠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 퉁명스럽거나 아주 귀찮은 듯이 대해서 말 걸기가 무섭다. 우리 동양권의 유교문화의 덕목인 연장자에 대한 존경의식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우리 50년대 출생자들이 ‘효도를 하는 마지막 세대요 효도를 못 받는 첫 세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똑 같은 말이지만 우리 세대가‘ 선배를 대접해 주는 마지막 세대요, 후배들에게 대접을 못 받는 첫 세대’ 임을 실감하고 있다. 
 
엊그제 처갓집에 다녀오면서 처갓집에서 장모님이 많은 반찬거리를 싸 주셨다. 차에 싣고 와서 우리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잠깐 짐을 내리느라 마당에 차를 세웠다. 길을 막긴 막았어도 잠깐 짐을 내리면 치울 거다. 그런데 저 쪽에서 나오는 차가 나를 보며 난리다. 유리창 너머로 보니 욕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30대 후반이나 될 나이다. 내가 정중하게 말했지만 대뜸 반말이 나왔다.
 
“같은 아파트 살면서 짐 좀 내리느라고 그러는데 그럽니까.”
“나도 이 아파트 사는 데 이렇게 길을 막을 수가 있어?”

나는 가만히 있는 데 옆에 있던 아내가 큰소리로 나무랐다.
 
“젊은 친구가 반말을 하네.”

아내가 나무라자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조카뻘 되는 녀석이다. 사실 짐 내리는 데 2분도 다 걸리지 않는다. 한 달 전에 내가 20년 동안이나 다니던 단골 병원에 갔다. 매월 한 번 가서 당뇨 약을 지어온다.
 
그 날은 점심을 밖에서 먹고 이빨을 안 닦아서 칫솔만 샀다. 치약은 집에 너무 많아 병원에 가서 좀 얻어 쓸 요량으로 그냥 간 것이다. 임상병리사에게 혈당을 재는데 바로 옆에 자기 들이 쓰는 치약이 통에 있어서 정중하게 좀 사정을 했다.
 
“선생님, 치약 좀 쓰십시다.”
  
나는 내가 20년 동안이나 다니던 단골병원이라 30대 정도의 임상병리사 여자 분이 그 냥 흔쾌히 ‘그러십쇼’ 할 줄만 알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데 쓸 수도 없고 해서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아주 못 마땅하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허락을 한다. 
 
정말 기분이 나빴다.  치약 좀 얻어 쓰는 것이 그리 결례를 한 것인가.  그래서 20년 동안이나 다니 던 병원을 옮길까 생각을 했다. 환자도 고객이며 환자가 오지 않으면 자기 일자리도 없을 텐데 저렇게 서비스 정신이 없는 것일까.
 
병원을 옮기더라도 병원에 지적은 해야 할 것만 같아 병원 누리집(홈피)에 그 불친절함을 올리려고 하니 아내가 한사코 말리는 것이다. 당신 딸도 서비스기관에 근무하는 데 남에게 피해를 주면 딸에게 돌아온다나. 그래서 참기는 했어도 기분이 나빠 그 병원에 다시는 가기가 싫다.
 
대안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기분이 나쁠 때가 많다.  내 자리에 책상을 좀 바꾸려고 옮기고 있었다. 책상을 학생하고 둘이 옮기느라고 낑낑대고 있는 데 내 교실 옆의 교실 문에 떡하니 기대어 서서 젊은 선생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표정이 차거워서 내가 먼저 “안녕 하십니까?” 인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인사도 받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대뜸 나에게 말을 쏟아 부었다.
 
“지금 애하고 면담하고 있는 데 좀 있다 하면 안 됩니까?”
 
정말 기분 나쁘다. 나보다 20살이나 어린 친구다. 20살이면 빨리 결혼했으면 자식뻘이다. 그리고 학생 면담하려면 그 교실 만 있는 것도 아닌데 시끄러우면 다른 교실에서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명예퇴직을 해서 8년이 된 후배와 대화를 했다. 그는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퇴직은 나보다 빨라서 은퇴 뒤의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내가 가끔 물어 보고는 하는 후배다. 그 때가 중국 상해 영사관에서 영사가 현지 여인과의 불륜 문제로 시끄러울 때다. 후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가서 국가를 위해서 일하라고 월급 준께는 여자들하고 불륜이나 저지르고 그러니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를 존경 하겄소.”
 
그 말도 맞는 말이다. 청문회에서 사회 지도층 정치인, 인터넷에 목사, 기업가들의 비리가 속속들이 쏟아지고 있으니 사실 존경할 만한 웃어른이 없다. 아내는 우리 사회가 너무나 경쟁사회여서 각박하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부터 순위경쟁, 사회에 나와서도 너를 죽여야 내가 사는 산업경쟁사회이다 보니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이다.
 
농경사회였던 50-60년대에는 얼마나 인심이 좋았느냐는 것이다. 그 때는 배낭하나만 메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을 얻어먹으면서 여행을 하는 무전 여행가들이 얼마나 많았느냐는 것이다.
 
80대인 어머니는 사람들이 살기가 너무 각박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는 날로 더해가며 서민들은 삶이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취업이 안되고 취업이 되더라도 생활안정이 안 되는 비정규직이니 마음에 평안이 없어 이웃에 사나움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고 보니 모두가 사회적인 요인들이다. 사회적인 요인들은 우리가 어찌 할 수도 없는 일들 아닌가. 사람들 각자가 온유하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려는 가치관을 가지고 친절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길 밖에는 말이다.
 
어느 덧 살다보니 나도 60 가까이 살았다. 이제야 삶을 조금 알 것만 같다. 자로 잰 듯이 손해 안 보려고  따지고 각박하게 산다고 해서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니더라. 복이 있어야 잘 산다.  그런데 복이란 놈은 낯가림이 무척 심한 어린아이 같아 아무나 잘 따르지 않는다. 마음이 착하고 온유하고 부드럽고 마음이 넓은 사람에게 잘 따르는 것 같다. 
 
기독교에서는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라는 말이 있다. 이웃에게 온유하고 따뜻한 마음을 베풀었을 때 복을 받는 다는 뜻이다. 아내에게 이 글의 결론을 어떻게 맺으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내 뱉는다.

“당신부터 가족들에게 좀 따스한 마음을 가지쇼. 걸핏하면 신경질부터 내는 사람이 사회가 따뜻해지기를 바라요.”
 
그 말도 사실 맞는 말이다. 나도 퇴직 이후로 약간의 우울증이 생겨 제일 가까운 가족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모두 사람마다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이웃에게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이 사회는 점차 삶이 즐거운 사회가 되지 않을 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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