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병 환자, 짜장면도 맘대로 못 사 먹어요!”[아내와 함께 떠난 벌교·낙안읍성·소록도 여행⑦] 국립소록도병원고흥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27번 국도를 따라 10분쯤 달렸을까. '녹동 2교차로' 안내표시판이 나타났다. 우측으로 나가면 도양·녹동항, 직진하면 금산·소록도(小鹿島)라 적혀 있었다. 말로만 듣던 '소록도'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심호흡과 함께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렸을 때, 아니 스무 살이 넘어서도 소록도는 '금단의 땅'으로 '가서는 안 되는 섬', '갈 필요도 없는 무서운 섬'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결혼 전 아내에게 "초보 간호사 시절 동료들과 국립소록도병원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소록대교를 지나는데 푸른 바다에 보석처럼 박힌 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소록도였다. 가슴이 뛰면서 예전 나병(한센병) 환자들 모습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어렸을 때 거리에서 봤던 그 환자들이었다. 어린 눈에도 그들은 지팡이를 휘두르는 상이군인보다 무서웠고, 구걸하는 거지보다 불쌍하게 보였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에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한하운의 <벌(罪)>)
그랬다. 그들이 '문둥이'로 불리던 시절에는 죄인도 그런 죄인이 없었다. 강도, 사기꾼도 국가가 관리하는 수용시설에서 의식주는 물론 다양한 교육을 받고 출소하는데, 그들은 피부가 문드러졌다는 죄도 아닌 죄로 친구, 이웃, 사회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옛 어른들은 우는 아이에게 '순사가 잡으러 온다!'며 겁을 줬다. 그러나 우리는 '문딩이가 잡아간다!'는 말을 더 무서워했다. 특히 보리가 패기 시작하는 초여름에는 보리밭 접근조차 꺼렸다. 문딩이가 보리밭에 숨었다가 아이들을 유인해서 간을 빼먹는다는 말을 사실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병이 불치의 병으로 인식되었던 1950~1960년대. 당시 어른들은 나병을 하늘이 내린 형벌(刑罰)이라 하여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는 나환자들을 '잘못 타고난 사회의 독버섯'으로 여겼다. 아이들은 귀신보다 나환자를 더 무서워했으며, 아낙들은 병이 옮는 것을 염려해 찬밥 한 그릇 동냥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탄식의 장소'였던 수탄장
국립소록도병원 주차장 입구 안내판에 "소록도는 관광지가 아니며 섬 전체가 병원으로, 한센인의 치료 공간입니다"라고 적힌 글귀를 삼가는 마음으로 3~4차례 읽었다. 700여 명의 환자와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살아가는 공간이어서 흥겨움이나 소란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바다를 좌우로 나누면서 해안을 따라 S자로 조성된 산책로 입구는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켰다. 수려한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감탄의 마음은 1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푸른 바다는 일제의 가혹한 학대를 피해 소록도를 탈출하다 익사한 환자들의 원귀가, 소나무 숲은 자식과 부모가 눈물로 만났던 탄식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1950~1960년대 소록도병원에서는 섬을 직원지대와 병사(病舍)지대로 나누고 2km 정도의 철조망을 쳐 경계로 삼았다. 병사지대 환자에게서 자녀가 태어나면 전염을 우려해 직원지대에 있는 미감아보육소에 격리시키고, 부모와 자녀들의 면회는 한 달에 한 번씩만 허락하였다. 이때 자녀와 부모들은 직원들의 통제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났으며 서로 만지거나 안아볼 수 없었다. 특히 전염을 우려해 자녀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안고 서야 했다. 이러한 면회 장소를 원생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렀다 한다. 당시 상황을 누군가는 '천벌이라면 가혹하고, 인위라면 가증스럽다'고 표현했다. 소록도 병원이 걸어온 애환의 발자취
수탄장에서 병원 본관까지 조성된 산책로(600m) 주변에는 소록도의 각종 문화재 위치도와 일제강점기에 완공된 건물들(소록도 갱생원 본관, 강당, 감금실, 검시실, 만령당, 식량창고 등), 소록도에 거주하면서 우리나라 한센병 퇴치와 계몽에 큰 역할을 한 마가렛 수녀 안내문, 애환의 추모비 등이 세워져 있었다. 병원 건물 앞에 세워진 애환의 추모비는 해방(1945) 후 일본인 소장과 직원들이 물러가자 자치권을 요구하다 처참하게 학살당한 원생들을 추모하는 비였다. 수용소장 자리를 노리던 친일파 직원들이 고흥 치안대에 지원을 요청하여 원생 84명을 총과 죽창 등으로 무참하게 살해해 송탄유로 불태웠다는 것. 끔찍한 사건임에도 반세기 넘게 묻혔다가 2002년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서양 선교사들이 1909년 광주를 비롯한 부산, 대구 등에 나병원을 개원하자, 일제는 1916년 2월 소록도의 약 1/5에 해당하는 30만 평에 나환자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자혜의원을 설립한다. 그나마 '조선나(癩)예방협회'라는 단체를 조직,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통해서였다. 시설 확장공사는 대부분 수용환자의 노동으로 추진하였다. 자혜의원은 100여 년 역사만큼이나 많은 변천을 거듭하는데, 1934년 소록도갱생원, 1949년 중앙나요양소, 1957년 소록도갱생원, 1960년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편된다. 1968년 국립나병원으로 개편하였으며 1977년 부설 간호보조원 양성소를 설치하고, 1982년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다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731부대' 떠올랐던 '감금실'과 '검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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