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오 통 가마'와 '육 통 가마'

[책 소개] 군산대 공종구 교수 <탁류>에 해설과 주석 붙여 새롭게

조종안 기자 | 기사입력 2011/09/03 [07:39]

지금은 사라진 '오 통 가마'와 '육 통 가마'

[책 소개] 군산대 공종구 교수 <탁류>에 해설과 주석 붙여 새롭게

조종안 기자 | 입력 : 2011/09/03 [07:39]
군산대학교 공종구(55) 교수(국문학과)가 풍자와 해학의 대문호로 알려진 백릉 채만식의 <탁류>(1939년 박문서관 펴냄) 정본에 나오는 방언과 속어, 고어(古語) 등에 이해하기 쉬운 해설과 주석을 붙여 새롭게 출판(현대문학 펴냄)했다.


▲ 군산시 임피면 '채만식 도서관' 전시실에 진열된 서적들     © 조종안


채만식(1902~1950)의 문학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장편소설 <탁류>는 제목 그대로 어둡고 혼탁했던 일제강점기 사회상을 '초봉'이라는 여인의 비극적 삶과 미두장(米豆場)을 배경으로 신랄하게 고발하며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1937년 10월 12일~1938년 5월 17일)되기도 했다. 

소설 <탁류>를 처음 대한 것은 1987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채만식 전집>을 통해서였다. 당시 책 두께는 낱말풀이 부록 포함해서 474쪽. 그러나 해설과 주석이 달린 공 교수의 <탁류>는 인상기와 작가 연보 합해서 644쪽으로 엮여 있다. 

"지역의 소중한 방언들이 사라져가는 게 아쉬워 작업 시작"

공 교수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낱말과 방언, 기존 판본에서 발견되는 오탈자를 수정하여 조금이라도 쉽게 읽도록 한다는 데 의미를 두었다며 '거니채다'(짐작하다, 낌새를 알아채다)와 '어여'(충청도 지역 방언)를 예로 들었다.

▲ 공종구 교수가 작업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조종안
이 책에서 돋보이는 또다른 부분은 주석 작업이다. "채만식 선생은 <탁류>에서 군산 지방의 방언을 자주 사용하였고, 고어가 많아 주석 없이는 판독하기가 어렵다"는 것. 또한 "지역의 소중한 방언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아쉬운 마음에 작업하게 되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공 교수는 "채만식의 작가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아온 <탁류>의 텍스트에 대한 연구사 작업은 한 편의 논문이 될 정도로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며 다양한 논의들을 두 유형으로 정리했다. 

하나는 일제의 수탈과 폭력으로 인한 식민지 근대의 사회·경제상을 치밀하게 묘파해내고 있는 리얼리즘적 성취를 보여준 탁월한 작품이라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식민지 조선 사회의 모순 구조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하지 못한 채 세태나 현상만을 평면적으로 스케치한 세태소설이나 초봉이의 수난을 축으로 한 흥미 위주의 통속소설 혐의에서 벗어나지 않은 작품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 교수는 이 글이 감당해야 할 과제는 두 가지라며 하나는 채만식의 평전을 약술하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탁류>에 대한 친절한 해설을 작성하는 작업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두 작업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것. 

소설 속 인물들, 한동네 살았던 이웃처럼 느껴져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 동네(<탁류>에 등장하는 '스래')에는 살짝곰보도 살았고, 진곰보도 살았고, 째보도 살았고, 열쇠 집을 하는 꼽추도 살았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친구도 있었다. 별명이 '떠들이 할매'도 살았고, 아저씨가 술과 노름을 좋아해서 이틀이 멀다하고 싸우는 집도 있었다. 그래도 오무래 오무래 모여 살면서 다정하게 지냈다. 

▲ 군산대 공종구 교수가 엮은 <탁류> 표지     © 조종안
그래서일까? 소설 속 인물들은 어렸을 때 한동네 살던 사람들처럼 느껴져 낯설지 않았고, 흥미가 넘쳤다. 그러나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낱말들이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낱말의 뜻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 그렇게 아쉬워하던 참에 해석과 주석을 붙여 새롭게 펴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그중 가슴에 와닿는 주석 몇 개를 발췌했다.

"봉지쌀 한 납대기(쌀 한 되), 모개지게(있는 대로 모두), 마새(말썽), 소댕(솥뚜껑), 깔끄막진(산이나 길이 몹시 비탈지다), 마슬러 보다(샅샅이 더듬거나 살펴보다), 뇌골스럽다(보기에 못마땅하고 아니꼽다), 허천들리다(걸신들리다) 여승(아주 흡사히), 유표하다(눈에 띌 만큼 두드러지다), 지장('지중'의 방언, 지중은 '아주 썩 귀한'이라는 뜻), 잘 쌘다(잘 어울리다)."

여기에서 '납대기'와 '소댕', '깔그막진', '허천들리다' 등은 지금도 군산지역에 사는 60대 이상 노년층이 자주 사용하는 방언이다. 특히 미두장, 구 조선은행, 째보선창, 해망굴, 스래(경포), 콩나물고개, 개복동 등 현재 실존하는 건물과 지명이 등장하고 있어 더욱 정겹게 다가왔다. 

지금은 사라진 '오 통 한 가마'와 '육 통 한가마'

스물한 살 먹은 맏딸 초봉이를 우두머리로, 열일곱 살 먹은 계봉이, 그 아래로 큰아들 형주가 열네 살, 훨씬 떨어져 여섯 살 먹은 병주 이렇게 사남매에 정주사 내외해서 옹근 여섯 식구의 한 달 양식을 걱정하는 대목도 눈길을 끌었다. 

"이 여섯 식구가 아이들까지도 입은 자랄 대로 다 자라, 누구 할 것 없이 한 그릇 밥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니 한 달에 쌀 '오 통 한 가마'로는 부족하고 '소불하' 엿 말은 들어야 한다. 또 나무도 사 때야지····." (32쪽) 

'오 통 한 가마'와 '엿 말'은 어려서부터 밥해 먹던 막내 누님이 집안 대사를 치른 후 "손님이 얼마나 많이 다녀갔는지 육 통 한 가마로 보름도 못 먹었다."고 푸념하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소불하(少不下)는 부사로 '모두 합하면, 적어도' 등의 한자어이고. 

옛날에도 '오 통', '육 통'의 뜻을 모르는 어른이 많았다. 째보선창에서 쌀가게를 하는 어머니와 손님의 대화를 귀담아들으면서 알게 되었는데 '한 통'은 '한 말(斗)'과 같은 의미였다. 해서 쌀 오 통 한 가마는 소두(小斗) 열 말(80kg)로 '대두(大斗)'로는 다섯 말이 된다. 그러니 '엿 말'은 '육 통 한 가마'의 다른 표현이 되겠다. 

쌀을 세는 단위로 지금은 사라진 정겨운 낱말 '가마니'. 그러나 그 속에는 식민지국가의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조선 시대에는 곡식을 셀 때 '섬'(한 섬에 두 가마)을 사용했으나 1900년대 초 일제가 들어와 수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가마니'(かます)로 통일시켰기 때문. 

'차일귀신'은 훗날 유명했던 '달걀귀신' 형님?

자신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던 꼽추 장형보를 죽이려고 사약(死藥)을 준비한 초봉이. 그녀의 눈에 비치는 장형보를 '차일귀신'에 빗대 설명하는 대목은 초등학교 시절 몸서리치도록 무서워했던 '달걀귀신'을 떠오르게 했다.

"오늘 아침 초봉이는 그렇듯 형보를 갖다가 처치할 생각을 얻었고, 그것은 즉 초봉이 제 자신의 '자살(自殺)의 서광(曙光)'이었었다. 행보 때문에, 형보가 징그럽고 무섭고 그리고 정력에 부대끼고 해서 살 수가 없이 된 초봉이는 마치 '차일귀신'에게 덮친 것과 같았다." (596쪽)

'차일귀신'은 처음 콩알만 하던 것이 주먹만 했다가 강아지만 했다가 송아지만 했다가 쌀뒤주만 했다가 이렇게 자꾸만 커가다가 마침내 차일처럼 획 하니 퍼져 사람을 덮어씌우고 잡아먹는 귀신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1950~1960년대 무섭기로 명성을 떨쳤던 '달걀귀신' 형님이 아닐까? 싶었다. 

주로 변소에서 산다고 소문난 달걀귀신은 크기가 계란처럼 자그마하고 예쁘지만, 깨트리려고 때리면 때릴수록 커져 결국 사람이 숨 막혀 죽는 무서운 귀신으로 알려져 오후에는 혼자 소변보러 가기를 꺼렸다. 망치나 도끼로 때리면 더 커진다는 달걀귀신은 대소변 얘기가 나올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철부지였던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1987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탁류>에도 130여 개의 낱말풀이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처음 대하는 속어와 고어 등으로 답답해진 가슴은 시원하게 풀지 못했다. 그렇게 목말라하다가 공종구 교수가 엮은 <탁류>에서 갈증을 해소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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