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宗敎 集團에서의 人生流轉<5>

제18회 300만원 稿料 논픽션 優秀作

진영은 | 기사입력 2015/11/04 [22:39]

어느 宗敎 集團에서의 人生流轉<5>

제18회 300만원 稿料 논픽션 優秀作

진영은 | 입력 : 2015/11/04 [22:39]




                                             陳 英 恩 

                           영모님의 按手按擦
약 대신 생수를 바르기도 하였는데 흔하지 않아 자주 바를 수도 없었다. 영모님한테 안찰을 받으면 단번에 나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안찰은 본인이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전도관 신도들은 누구든지 영모님께 안수 안찰 받기를 열망하였으나 아무나 받을 수는 없었다. 영모님 측근사람의 청에 의해 허락한 사람이나 주님사업에 공이 큰 전도관 관장, 소비조합 종업원, 혹은 많이 바친 사람들로서 주님사업에 이바지한 공이 인정된 사람들이 비교적 안찰을 자주 받을 수 있었다.

공이 인정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날짜를 잡아서 해주기도 하였으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나는 하학 길에 공장에 들러 사탕 싸는 작업을 여러날 했다. 봉사의 대가로 표를 받아 그 표를 모아서 눈 안찰표를 획득할 수 있었다. 눈 안찰이란 영모님이 엄지손가락을 두 눈에 대고 잠시 있는 것을 말한다. 나는 꼭 한번 받았는데 마치 엄지로 두 눈을 꾹 누르는듯한 감이 들었다. 눈알이 쑥 빠졌다가 다시 들어온 느낌이 들었고 한참동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배 안찰은 배를 두 손으로 만지는 것인데 나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어떤이는 영모님의 손이 닿기도 전에 아파서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배에 멍까지 든다고 하였다. 죄가 빠져나오느라고 마귀가 요동을 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고통이 심한 사람일수록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무런 감각이 없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기 힘든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영모님의 설교를 통해 나온 말이었다.

안찰을 받으면 죄가 씻어지는데 그때 나오는 억만 마리의 마귀가 다 자신에게 들어왔다가 고통을 주고 나가니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다고 하며 “제발 씻어주었으니 다시는 더럽히지 말라”고 설교를 했다. 소문은 항상 사실보다 부풀어있기 마련이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전도관의 신자들은 박태선이 손 씻은 물, 발 닦는 물까지 마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가 세수한 물을 마시라고 준다면 마실 만큼 100% 신뢰하고 추종하였다.

신앙촌에 들어간 신자들은 있는 것을 몽땅 다 팔아 바치고 알거지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알거지가 된 것은 아니었으나 신앙촌 입주를 위해 세상의 많은 것을 버리고 온 것은 사실이었다. 논과 밭을 팔아서 들어온 신도들에게 시온주식회사의 이름으로 주식을 발행한 뒤 배당금은 커녕 원금조차 돌려주지 않았으니 그런 소문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었다.




                             魔鬼들린 者
영모님의 축복의 위력은 대단했다. 외할머니는 감기가 들자 축복한 카라멜 껍데기까지 삶아서 그 물을 마셨다. 축복비누, 축복 솔, 축복간장. 전도관 신도의 가정에는 영모님이 축복한 어느 한 가지라도 가지고 있었다. 축복하는 방법은 물건위에다 두 손을 휘휘 저으며 “쉬익 쉬익”하고 부는 것이었다. 아픈 사람들은 축복 솜을 가슴에 붙이고 자는가 하면 축복비누를 바른 솜을 상처에 붙이기도 하였다. 중병환자의 경우에는 영모님이 입던 내복을 얻어 입었으면 했다. 수단이 좋은 사람들은 실제로 얻어 입기도 했다.

사람들은 초창기 때의 은혜 받은 이야기들을 자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신을 체험했다고 말했다. 은혜가 이슬같이 임하는 광경을 목격했다든가, 향취가 진동했다든가, 성령의 불을 받아 온 몸이 뜨거워졌다 혹은 생수가 통해서 가슴속이 시원했다는 등의 체험담을 예기했다. 나는 열심히 믿느라고 애는 썼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그런지 은혜의 체험을 한번도 받지 못했다. 은근히 낙심이 되었다. 그러나 “너희가 이적을 보고 믿는 자 보다 이적을 보지않고 믿는 것이 더욱 복되다”라는 성경 귀절로 위안을 삼았다.

1960년 12월 전도관의 성화가 조작된 것이라고 보도하자 신도들이 동아일보사를 습격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동아일보 난동사건>을 일으켰다.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신도들은 그 일을 두고 “주의 일을 위해 분투한 것”으로 자랑하곤 하였다, 마귀들에게 본때를 보여줬다는 식이었다. 1958년에 박태선 씨가 폭행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을 때도 많은 신도들이 몰려가 소란을 피웠다. 그가 1961년 수감 되었을 때 신도들은 “저희 가지들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 받으시는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하며 기도를 했다.

그러나 신앙촌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영원히 살려고 들어왔다가도 뭔가를 깨닫고 다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소문이 나게 된 것이다. 신앙촌 사람들의 표현을 빌면 그런 사람들은 “멸망 받을것 들”이었다. 박태선을 받들던 사람들 중에 크게 부각되었건 인물로는 김풍자 권사와 손선보 전도사가 있었다. 김풍자 씨는 [남방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마력이 강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박 씨가 김풍자 씨를 어느 날 갑자기 단에서 마귀의 앞잡이라고 외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그만 마귀가 되고 말았다.

마귀 들린 자 와는 얼굴도 쳐다보자 말라고 하였다. 손선보 전도사는 거물급 전도사라고 했다. 손선보 씨는 김씨를 어머니로 부르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어느 날 김풍자 씨와 같은 패라고 하여 그 역시 마귀로 몰렸다. 손 씨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박 씨에게 찾아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는 것이다. 손 씨는 자신의 결백을 보이기 위해 김 씨가 보내온 편지를 손으로 만지지도 않고 집게로 집어 불에 태울 만큼 박 씨에게 충성심을 보였으나 박 씨는 손 씨를 다시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 사건은 내가 신앙촌에 입주하기 전에 있었던 일로 신도들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전도관의 집사, 권사, 장로라는 호칭은 기성교회에서 처럼 어떤 직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이가 작으면 집사요 많으면 장로 그런 식이였다. 신앙촌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다 그렇듯 나 역시 꿈같은 여고시절을 가져보지 못하고 보냈다. 꿈이라면 제1신앙촌에서 제2신앙촌으로, 제2신앙촌에서 제3신앙촌으로 뽑혀 들어가 깨끗이 씻음 받아 천년성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믿는 아이들은 소수였는데 나도 그 소수에 속했다.

학교에서는 영화구경, 소풍, 수학여행 등 오락성을 띠는 것들은 일체 금지하고 있어서 정서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졸업 무렵 어느 선생님께서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보다 주님사업을 위해 덕소 제2신앙촌 공장에 들어가는 길이 더욱 복된 일이라고 하였다. “이제 두고 보아라 제2신앙촌에 아무나 들어갈 줄 아느냐 때가 되면 들어가고 싶어 울고불고 해도 문을 닫을 때가 온다. 지금 들어가는 자가 복된 자이다” 라는 이야기로 학생들을 설득시켰다. 

                      제2신앙촌으로 이사
제2신앙촌은 1962년 양주군 와부읍 덕소리 528번지에 세워졌다. 신앙촌을 세우게 된 동기는 죄인들로 구성된 일반사회에 살면 자연히 죄에 물들게 되어 의인이 되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신앙인만 모여 사는 마을을 만들어 그 속에서 의인의 숫자를 채우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기 위하여 제1신앙촌, 제2신앙촌, 제3신앙촌을 차례로 만들어 2신앙촌부터는 믿음이 좋은 사람만 뽑아서 간다고 하였다.

덕소에 세워진 제2신앙촌은 믿음 좋은 사람만 뽑아가지 않고 집을 살 수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 들어갔다. 소사의 공장을 덕소로 옮기면서 영모님도 소사신앙촌에서 떠났다. 덕소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영적엄마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며 몹시 섭섭해 하였고 덕소 식구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덕소에 들어간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덕소신앙촌에 들어가면 소사에서 행실이 좋지 못했던 사람들도 은혜스런 사람들로 변하겠지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믿는데 선두를 달리는 사람은 항상 언니였다. 언니는 졸업을 하자마자 덕소 신앙촌공장 종업원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덕소신앙촌공장 지대에 있는 됫박 같은 방을 하나 사서 언니가 자취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언니 뒤를 이어 외할머니와 남동생이 따라 들어갔다. 어마니 역시 2신앙촌의 시온제2국민학교의 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입 재수를 하던 나만 소사에 남게 되었다.

2신앙촌은 1신앙촌보다 엄격하여 잘못하면 쫓겨나기가 일쑤였다. 집안 식구라도 신앙촌밖에 사는 사람은 들어가서 함께 잠 잘 수가 없었다. 면회를 가면 경비가 안내일지에 기록한 후 집에 연락했고 식구들이 나와서 데려가기 전 까지는 집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는 누가 나올 때 까지 안내소 대기실에서 종일 기다려야 했다.

나는 1968년에 대학에 입학한 뒤 4월초에 덕소신앙촌에 들어가게 되었다. 덕소에 들어오기 전에는 가족과 함께 있게 되는 즐거움과 영모님을 매일 뵐수 있다는 즐거움을 가지고 들어왔지만 첫날부터 힘이 들었다. 2신앙촌 밖에서 살던 사람은 [세력]이 있어서 집식구라도 함께 잘 수 없다고 했다. 신참 입주자가 자는 방이 따로 있었는데 거기에서 일정기간 연단을 받아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함께 자면 씌운다고 했다.

나는 낮에는 집에 있다가 밤이 되면 제과부 3층에 잇는 신참입주자 숙소로 갔다. 여러 사람이 자게 되어 있어서 방은 무척 컸다. 다다미가 깔려있었는데 4월의 밤 날씨에도 추워서 웅크리고 자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날이 새면 다시 아파트의 집으로 갔지만 시원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소사에 있으면서 가끔 다녀갈 때에는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2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5식구가 살고 있으니 비좁기 말 할 수 없었다. 집과 숙소를 20일정도 왔다 갔다 한 후 몇몇 사람들과 함께 박 씨의 안수를 받고서야 집에서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앙촌에도 예외는 있어서 학교 때 한반이었던 경희는 아버지가 시온형광등 공장에서 주요직책을 맡고 있었던 덕분으로 어려운 수속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불평불만은 가득했지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참된 길은 가시밭길과 같은 것이다”를 잊지 않았고 그 말로 위로를 삼았다. 일단 2신앙촌에 들어온 사람은 영모님의 허가 없이는 마음대로 밖에서 자고 들어 올 수 없었다. 신앙촌 밖에서 자고 들어오면 마귀세력이 씌운다는 것이다. 밖에서 자고 들어온 사실이 밝혀지면 여차 없이 쫓겨났다. 밖에서 자고 들어온 것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으면 동참죄를 범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설교하였다.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는 셈이었다.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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