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맛본 연길 '단고기 샤부샤부', 별미네!

'2011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와서 (28)

조종안 기자 | 기사입력 2011/05/30 [05:06]

처음 맛본 연길 '단고기 샤부샤부', 별미네!

'2011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와서 (28)

조종안 기자 | 입력 : 2011/05/30 [05:06]
항일 유적과 함께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 다섯째 날(1월14일)은 이른 아침부터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청산리전투' 유적지를 시작으로 '3·13 만세운동'(1919년)이 일어났던 용정(龍井)역까지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숙소가 있는 연길(옌지)로 이동했다.

 
▲ 명동촌에서 용정으로 나오는 길목의 농가. 초등학교 미술시간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초가, 마당, 암탉, 판자 울타리 등이 들어간 그림을 자주 그렸거든요.     © 조종안


버스가 용정을 벗어난 시각은 오후 4시 50분. 땅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조금 전 명동촌에서 봤던 농가 풍경이 떠올랐다. 만주에서 보기 드문 초가와 눈 쌓인 마당, 먹이를 찾는 암탉, 비탈진 고갯길 등 모두 푸근하고 정겨운 풍경이어서 잔영이 오래도록 남았다. 

특히 사립처럼 엮은 허름한 판자 울타리와 대문도 없는 시골집 마당은 고요가 너무 깊어 스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땅거미는 지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까 더했다. 그래서인지 부를수록 마음이 외롭고 쓸쓸해지는 동요 <오빠 생각> 가사가 떠올랐다. 

만주에서도 동북쪽에 자리한 흑룡강성(헤이룽장성)의 농촌에서는 초가지붕과 마당이 넓은 집을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두만강과 인접한 조선족 자치주에 속한 농촌은 넓은 들녘과 초가가 자주 눈에 띠었고, 마당 분위기도 한국의 옛 농촌과 다를 게 없었다. 

박영희 시인은 연길에 도착하면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에 잠깐 들르겠다며 지금의 연변 예술극장 자리에 연길감옥이 있었다고 말했다. 박 시인도 종일 설명하느라 성대에 무리가 갔는지 목이 잠겨 있었다.

창밖이 어두워지니까 답답했다. 정겨운 풍경을 볼 수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한가하게 자료집을 뒤적이거나 메모할 수 있는 처지도 못 되었다. 버스에 조명시설은커녕 의자에 물병이나 책 등을 넣을 바구니도 달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설이 그 수준이니 운전하는 기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불만을 토로해봐야 나만 손해,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해서 심호흡을 몇 차례 하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데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 들렸다. 저녁은 단고기(개고기) 전문 식당에서 '단고기 샤부샤부'를 먹는다는 안내였다. 입에 군침이 괴면서 피로가 싹 가셨다. 

항일 독립투사들이 의지를 불태웠던 '연길감옥'

버스는 30분쯤 달려 불빛이 환한 연길 시내로 진입했고, 오색 창연한 등불로 단장된 거리를 지나 연길 감옥투쟁 기념비 앞에서 멈추었다. 기념비 역시 두 번째 방문이지만, 독립투사들이 모진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던 장소여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연길 시내 야경. 변두리는 초저녁에도 어두웠습니다.     © 조종안
▲ 연길역 부근에 세워진 '연길 감옥항일투쟁 기념비’. 옛날 감옥은 화장실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 조종안


박 시인이 일행 앞으로 나와 연길감옥은 어떤 곳이고, 언제 누구에 의해 파옥되었는지 설명했다.

"만주 항일 투쟁에서 용정이 전반기 역할을 했던 곳이라면 연길은 후반기에 속합니다. 그 대표적인 건물이 '연길감옥'입니다. 1924년에 지은 감옥은 항일투사들이 몇 차례 파옥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어요. 그러나 1935년 6월 7일 김병주, 리영춘, 리대근 등 17명의 결사대가 일본 감옥장을 처단하고 수감되어 있던 독립운동가 수백 명을 해방시켰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연길감옥은 연길시 한복판을 가로질러 두만강과 합류하는 부르하통하강(조선족 1세대들은 '연집강'이라 불렀음)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9·18사건(1931년) 전에는 '길림성 제4감옥'이라 했으며 일제 통치시기에는 '연길 모범감옥'이라 불렀단다. 

박 시인은 항일전쟁 시기 만주의 많은 감옥투쟁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한 투쟁이었다며 2차 탈옥에 실패한 '리진'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며 부른 노래가 널리 퍼져 항일 투사들의 의지를 불태웠던 <연길 감옥가>도 소개했다.

바람 세찬 남북 만주 광막한 들에/ 붉은 기에 폭탄 차고 싸우던 몸이/ 연길감옥 갇힌 뒤에 몸은 여위어도/ 혁명으로 끓는 피야 어찌 식으랴.

가사는 짧았지만, 힘이 넘쳤다. 영하 20~30도 추위에서 풍찬노숙으로 연명하며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항일정신이 엿보이기도 했다. 일행들도 감탄사를 터뜨렸다. 어렸을 때 봤던 영화에서 일본군 고지를 점령한 독립군이 총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전율이 느껴졌다. 

처음 맛본 '단고기 샤부샤부', 별미로세!

연길감옥 기념비를 둘러보고 버스에 올랐다. 박 시인은 곧바로 식당으로 갈 것인지, 숙소에 들러 샤워하고 저녁을 먹는 게 좋을지 물었고, 일단 짐을 풀고 홀가분하게 먹어야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는 의견이 다수여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 정갈하게 차려나온 단고기 샤부샤부 식단. 특별한 반찬 없이 고기맛으로 승부를 거는 식당 같았습니다.     © 조종안


단고기 전문 식당은 실내장식이 생각보다 고급스러웠고 규모도 컸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손님을 안내하는 종업원도 많았다. 종업원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조금 있으니까 음식이 차려졌다. 단고기를 못 먹는 두 분을 위해 생선탕 2인분을 따로 주문했다. 

테이블 중앙에 육수가 담긴 작은 무쇠솥이 올려지고, 단고기 수육과 함께 순대도 한 접시 올라왔다. 순대가 먹음직스럽게 보이기에 하나를 입에 넣었더니 쫀득쫀득, 차지고 고소한 맛이 그만이었다. 특히 생각지 않은 김치가 올라와 식욕을 돋우었다. 

 
▲ 단고기 수육. 입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었는데요. 고기 한 첨, 한 첨에 정성이 담겨 있어 보는 눈도 즐거웠습니다.     © 조종안


상차림이 생각보다 정갈했고 전문성도 돋보였다. 수육에 채소 고명을 소담하게 얹은 수육이 한 테이블에 세 접시씩 놓였는데, 눈으로 보기에도 단고기 전문식당임을 알 수 있었다. 고기에 칼을 대지 않고, 결을 따라 손으로 정성스럽게 찢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시식 횟수는 1년에 4-5회에 지나지 않지만, 보신탕 애호가로 주로 탕을 먹었지, 샤부샤부는 처음이어서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었다. 그런데 고기를 사골국물 비슷한 육수에 담갔다가 매콤한 소스에 찍어 먹었더니 오감(五感)이 환상적으로 느껴지면서 "별미 중의 별미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 테이블에 아홉 명이 앉았으니 세 사람에 한 접시꼴이었다. 그럼에도 금방 빈 접시가 되어 추가로 주문했다. 1인분에 40위안(7000원)이니 값도 착한편이어서 부담이 없었다. 기본 입맛은 누구나 같은 법. 다른 일행도 생각했던 것보다 맛있다며 즐거워했다. 

연길의 '개탕(보신탕)'이 유명하다는 것은 작년 8월 심양-연길 기차에서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고, 맛있게 시식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진정한 맛은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2011년 1월 14일 단고기 샤부샤부에서 느낀 것 같다. 

만나고 싶었던 '총각 사장' 못 만나 아쉬워

 
▲ 카메라 사진을 외장하드에 옮겼던 휴대폰 가게 (작년 8월). 고마웠다고 인사하러 갔는데 주인을 만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 조종안


저녁을 먹고 나오면서 이동일(25) 안전가이드한테 길 안내를 요청했다. 작년 여름 기행 때 카메라 사진을 두 번이나 '외장 하드(USB)'에 옮겨준 휴대폰 가게 주인을 만나러 가려는데 동행할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주에 가면 주의할 점 몇 가지. 호텔 열쇠 보관은 기본이고, 외출은 짝을 지어서 할 것. 지갑은 되도록 소지하지 않는 게 좋으며, 사람들 앞에서 돈 많은 티를 내지 말아야 하고, 소매치기를 조심할 것 등이 생각나 부탁했는데 고마웠다. 

택시를 타고 작년 여름에 투숙했던 '호텔' 쪽으로 갔다. 택시에서 내려 기억을 되살려 어렵게 찾아갔더니 총각 사장(주인)은 보이지 않고 여학생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교육받으러 갔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로 안부를 묻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가이드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방으로 올라가 닷새 동안 지출한 돈과 기억에 남는 일들을 메모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시계는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겨울 기행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잠들기가 싫었다. 하지만 만주의 하루는 또 바뀌고 있었다.

* 2011년 1월 10일부터 17일까지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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