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과 '뮨처'의 민중신학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29)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의 대립

유태영 박사 | 기사입력 2013/09/20 [05:42]

'루터'의 종교개혁과 '뮨처'의 민중신학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29)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의 대립

유태영 박사 | 입력 : 2013/09/20 [05:42]
중세기에 있어서 유럽사회를 하나로 묶는 힘은 바로 로마 카톨릭교회가 보유하고 있는 교권의 전통적인 힘이었다. 세속 권력들이 분산되어 있는 유럽사회의 상황을 이용하여 로마 카톨릭교회는 유럽 전체에 대하여 보편적인 교회의 교리를 무기로 삼아 종교와 정치적인 유일한 지배세력이 되어 1,200여 년 동안 계속 지배했다.
 
하지만 종교적 권위주의와 막강한 정치적 권력으로 유럽 세계를 통치하던 카톨릭교회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성직자들의 타락은 민중의 눈에 명백하게 노출되었으며 심지어 성직권과 속죄권을 판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카톨릭교회 자체의 부패는 중세 유럽사회에서 교권의 기반을 상실하게 됐다.
 
교황의 영향권안에서 지배를 받고 있던 유럽의 여러 지방의 황제들은 자기들의 영토안에서 로마 교황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황권은 유럽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당시 유럽에서 카톨릭 교황에게 충성하는 종교적 세력이 가장 강한 곳은 바로 독일이었다. 독일은 로마 교황청의 가장 좋은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독일의 황제 카를(Karl) 5세(1519-56)는 로마 교황청의 막강한 정치력을 배경삼고 유럽 전체를 기독교화하여 정치적인 지도력을 성취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으면서 로마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독일의 황제 카를 5세는 독일 남부지역에 있는 광산과 금융업의 소유자인 <푸거 가문>과 유착되어 있으면서 막강한 경제력으로 독일을 지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황제 카를 5세는 로마 교황청과 밀착되어 있으면서 교황청의 <돈줄>이 되고 있었다.
 
독일 황제 카를 5세의 이와 같은 허망된 정치적인 야망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반대하는 반응을 일으킨 것은 독일 연방의 여러 군주들과 제후들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군주들과 제후들은 첫째로 자신들의 지역의 독립성이 상실되는 것을 염려했으며 둘째는 로마 교황청으로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데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황제 카를 5세와 <푸거 가문>에 대하여 반대하는 저항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독일의 민중들이었다. 독일의 상인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특히 농민들이 결집한 민중운동 단체들의 분노는 곧바로 로마 교황청에 대한 항쟁으로 전환되었으며 특히 카를 5세 정권에 기생하는 교회에 반항세력으로 굳게 뭉치고 있었다.
 
독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발생하고 성공한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독일 민중운동 단체들의 반교권과 반정치적인 항쟁이 전개되는 상황하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1. 루터 종교개혁의 위대성에 대하여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독일의 중상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문학과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에 속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1505년 7월 2일, 길을 걸어가던 도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바로 루터 옆에 떨어지는 순간에 구사일생의 위기에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루터는 하늘에서 벼락이 바로 자신의 옆에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에 깜작 놀라는 순간에 이를 <하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루터는 즉시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신부가 되겠습니다>라고 맹서를 했다. 루터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05년 7월 17일에 곧바로 성어거스틴 은둔자 수도원(검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승으로서 신부가 됐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10여년 동안 성경을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면서 인간은 오직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통하여 개인적인 신앙심을 성장시킬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또한 인간은 신의 소명의식을 직접 받고 신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분명히 깨닫게 됬다. 이와 같은 루터의 학문적인 깨달음은 영적인 안목으로 연결됐다.
 
그때까지 카톨릭교회를 통해서만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전통적인 카톨릭교회의 교리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루터는 이러한 카톨릭교회의 교리에 대하여 정면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터는 특히 그때 당시 카톨릭교회에서 성행하고 있는 <속죄권 판매>제도에 대하여 정면으로 로마 교황청을 향하여 반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1516년-1517년에 계속하여 독일 교회를 향해 <면제부 판매>를 맹렬히 규탄하면서 동시에 종교개혁을 위한 <개혁 95개조>에 대하여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면제부 판매>를 제도화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힘없고 지식 수준이 낮은 민중들의 주머니에서부터 돈을 긁어 모으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었다. 판단력이 낮은 민중들은 죄값으로 <면제부>를 구매하면 죄는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구입한다고 하는 카톨릭교회의 교리를 아무 의심없이 믿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무지한 민중들을 깨우치기 위한 의미깊은 종교적인 사명감이었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에 드디어 종교개혁을 위하여 <개혁 95개조>를 독일의 유명한 성당인 비덴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내걸었다.
 
로마 카톨릭교회 교황청 창설 이래 1,200년 역사에 있어서 <종교개혁 95개조>를 공개적으로 제시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은 처음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루터의 이와 같은 항쟁으로 인하여 로마 카톨릭 교황청은 카톨릭교회의 개혁(Protestant Reformation)을 주장하는 문제에 처음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루터의 <개혁 95개조>는 순식간에 전 독일에 퍼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까지 전달되었다. 다급해진 로마 교황청은 루터의 폭발적인 영향력을 잠재우기 위하여 이른바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개설하여 루터의 주장을 진압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개설한 이 논쟁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카톨릭교회의 잘못된 신학을 공개적으로 맹비난하면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 <회생과 봉사의 신학>을 보다 더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루터는 그의 신학적인 지식과 종교적인 양심은 오직 인간의 이성과 신의 뜻에 순복하고 따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면죄부 이미지     


 
카톨릭 교황청은 할 수 없이 루터를 이단 재판에 넘길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루터를 로마로 소환할 것을 지시했다. 카톨릭 교황청에 소환을 받고 로마에 도착한 루터는 1518년 10월 12-15일에 당대의 유명한 카톨릭교회의 추기경의 심문을 받으면서 교황의 권위에 순복해야만 한다고 위협을 받았다. 루터에 대한 심문은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1520년 6월 24일에 최후로 60일간 기회를 주면서 루터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레오 교황에게 사죄를 구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강압적으로 명령했다.
 
하지만 루터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루터의 고집에 대하여 분노한 교황청은 루터의 모는 저서들과 문건들을 몰수하여 화형식을 거행하여 불태워 버렸다. 이에 항거하여 루터는 교황청의 교서들과 교황청 법전들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하여 루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카톨릭 문서들을 불태워 버렸다. 이로써 독일 출신이며 카톨릭교회 사제인 루터는 로마 카톨릭교회 교황청과 관련이 있는 모든 책, 물건 등을 불태워 버리고 완전히 홀로 서는 사제가 되었다.
 
1521년 1월 3일에 로마 교황청은 드디어 루터에 대한 로마 <교황의 파문>을 공식으로 전 유럽에 발표했다. 로마 교황의 파문은 루터에게 있어서 정신적으로 깊숙한 상처를 안겨주는 인격적인 사형선고였다. 하지만 루터는 교황의 파문 따위에 대하여 전혀 동요하지 않고 더욱 더 굳건히 서서 정의를 위해 투쟁했다. 
 
여기까지의 모든 기록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에 관련된 <위대성>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요점들만을 지면상 제한으로 짧게 간추린 역사적인 기록들이다. 루터는 독일인 카톨릭 신부로서 그의 종교적인 신념을 교황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면 루터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뒤에 독일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독일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처지에 놓여져 있었으며 또 어떠한 역할을 계속했는가에 대하여 좀 더 깊이 고찰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 루터 종교개혁의 허구성에 대하여

 
루터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면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때 당시 유럽 기독교 문명권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명실공히 사형선고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중형이었다. 그 누가 루터를 잡아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았다. 루터는 로마제국의 통치권하에서 어디를 가던지 법의 보호를 받는 자격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루터는 이러한 위험속에서 복장을 변장하거나 성명을 바꾸는 비상대책을 세워야만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위기속에서 루터의 독일 민족에 대한 <민족정신>은 오히려 전보다 더 강력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루터는 이미 <독일 민족에게 고함>이라고 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배포하고 있었다. 루터는 독일 민족과 독일 교회의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더 이상 로마제국과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권적인 외세에 독일이 예속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급선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죽음의 위기로부터 지켜내고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루터는 우선 급하게 독일의 연방 군주들과 제후들의 도움을 받아 은신처를 구할 수 있었다.
 
독일의 황제 카를 5세는 여전히 로마 카톨릭 교황에게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 루터의 신분보호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냉담할 뿐이었다.
 
하지만 루터의 신분을 보장해 주고 은신처를 제공해 주는 사람들은 독일의 지방 군주들과 제후들이었다. 루터는 독일 지방 군주들과 제후들의 은덕을 받아 들이고 그들이 제공해 주는 비밀 은신처에 숨어서 생존할 수 있었다. 독일 군주들과 제후들이 루터의 신분을 보장해주고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루터가 독일의 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 로마 제국과 로마 교황청에 대항하여 싸우는 용기와 정치적 의미에 대해 동감하고 정치적인 지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루터는 군주들과 제후들의 도움을 받아 숨어 있으면서 무엇을 했을까? 루터는 숨어 있으면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중세기 역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꿈을 실현시키고 있었다. 그때 당시 중세기 유럽에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한다는 사실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중범죄에 해당하는 큰 사건이었다.
 
첫째는 신신성모독죄가 되는 범죄행위였다. 둘째는 로마 제국과 로마 교황청에 대한 반역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이었다. 중세기에 있어서 성경은 오직 라틴어로만 읽어야 하며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은 오직 교회의 사제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런데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든지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경책을 교황과 신부들의 독점으로부터 해방시켜 일반 평신도들의 손으로 들어오게 하는 큰 혁명적인 변혁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중세기 봉건주의 사회에 있어서 일반 신도들은 오직 신부들의 설교만 경청하고 무조건 신부들의 설교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독재적인 전통이었다. 그런데 루터가 어려운 라틴어 성경을 누구나 다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은 종교적 의미 뿐만 아니라 문화와 정치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한 것은 교권이 무너지고 민중들이 종교적 억압과 착취적 제도로부터 해방됐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것을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신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뜻이다. 1,200여 년 동안 로마 카톨릭교회에 예속되어 노예처럼 살아오던 독일 민중들에게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힘입어 1524년에 독일 슈바르츠발트 지방에서 <농민반란>이 대대적으로 발생했으며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특히 독일의 남부지역으로 확산된 농민들의 반란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이른바 <농민전쟁>으로 발전하여 1524-25년에는 농민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독일 남부지역은 특히 광산업과 경제력의 중심지로써 정치적으로 군주들과 제후들의 통치에 있어서 이해관계가 중요시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이 제시한 요구 조건은 바로 <12개조>였다. 농민들이 제시한 요구조건의 핵심을 요약하면, (ㄱ) 농노제의  폐지, (ㄴ) 교회에 바치는 10분의1 수탈제도의 폐지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농민들의 정당한 요구가 묵살되고 말았다. 독일의 <군주>들과 <제후>들과 그리고 독일 교회의 <사제>들은 단결하여 농민의 요구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농민전쟁>을 사상적으로 불순한 정치적인 음모로 부각시키고 있었다.
 
독일의 기득권 세력인 군주들과 제후들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을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한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군주들과 제후들 그리고 독일 교회 사제들이 공민권이 없는 루터를 숨겨주고 보호해준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루터를 숨겨주고 보호한 이유와 목적은 오로지 로마제국의 통치로부터 독일민족의 자주를 쟁취하기 위하여 로마제국과 투쟁하는데 있어서 루터의 종교개혁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하여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독일의 군주들과 제후들 그리고 독일 교회의 사제들은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고 있는 농민들의 봉기와 농민전쟁에 대하여서는 근본적으로 원하지 않는 하나의 <사회적인 부작용>으로만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독일의 정치적인 기득권 세력은 <농민전쟁>을 원천봉쇄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로지 <독일민족의 자주권>을 위한 투쟁이라고만 주장할 뿐이며 루터의 종교개혁이 농민과 노동자 (민중)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과는 하등의 연관성이 없는 것이라고 독일의 기득권세력들은 주장했다.
 
독일의 기득권 세력은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직 독일의 <민족주의>를 위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민족주의>만이 애국정신이라고 주장했다. 군주들과 제후들 그리고 교회의 사제들은 <농민전쟁>에 대하여 외면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독일 교회의 사제들은 <농민전쟁>을 반기독교적인 이단으로 규정했다.
 
여기에서 <농민전쟁>에 대하여 종교개혁의 장본인 루터의 입장과 태도는 어떠했는가에 대하여 초점이 모아진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황으로부터 1531년에 파면을 당했으며 1546년에 사망했다. 그런데 루터는 파면을 당한 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약 15년간 독일의 군주들과 제후들 그리고 교회의 사제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루터가 15년 동안 독일에서 활약한 이모저모를 살펴 본다.
 
ㄱ.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의 영향으로 인하여 독일에서 개신교가 태동했으며 루터 사망 후에 독일에서 <루터교>가 실제로 창설됐다.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문화와 정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루터는 1525년에 카톨릭 수녀와 결혼하여 루터 자신이 주장한 개혁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 주기도 했다.
 
ㄴ. 하지만 루터는 그의 삶의 후반기에 들어서서 종교개혁의 이념과는 완전히 배반되고 왜곡된 이론들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를 존경하던 많은 민중들은 크게 실망했다. 루터의 모순되고 왜곡된 이론은 무엇이었을까? 독일의 농민들은 농민전쟁을 일으켜 기득권 세력인 군주들과 제후들 그리고 카톨릭교회의 사제들과 투쟁을 벌이고 있는 매우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긴박한 상황에 있어서 루터의 역할은 무엇이며 도대체 루터는 어느편에 섰던 것일까? 루터의 역할은 매우 실망적이었다.
 
ㄷ. 독일의 농민들이 토지를 독점하고 있는 영주들의 착취에 저항하여 일으킨 농민들의 이른바 <농민전쟁>은 사실에 있어서 루터 종교개혁 운동의 영향에 의하여 발생한 < 농민전쟁>이었다. 그러므로 루터는 처음에는 농민들의 봉기에 대하여 동정적인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게 웬말인가? 농민들의 투쟁에 대한 루터의 태도는 180도 전향하였다. 루터는 농민들의 투쟁을 사탄 마귀의 불순한 공작이라고 해석했다. 루터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영주들에게 항거하는 농민들의 투쟁에 대하여 강경진압을 하도록 영주들에게 요청을 했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독일의 모든 군주들과 제후들에게 서신을 보내 농민군들의 항쟁을 진압하라고 선동하기까지 했다. 사실에 있어서 루터는 마음속에 판단하기를 그의 종교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농민전쟁>을 지원하는 것이 결코 유리한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을 했다. 그리하여 루터는 종교개을 속히 완성하기 위하여는 독일의 군주들과 제후들 그리고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영주들과 결탁해야 한다고 분명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종교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ㄹ. 루터는 판단하기를 억압당하는 민중을 구하라고 하는 신의 명령에 순종하는것 보다는 우선 현재 실권을 쥐고 있는 군주들과 제후들의 힘과 결탁하여 종교개혁을 그의 생전에 완수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루터의 욕망은 독일 교회가 세속 정권과 긴밀하게 유착되는 역사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루터가 개혁하기를 원하는 독일의 개신교는 역사의 초창기부터 정권과 기득권력과 유착되었기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민중을 외면한 종교개혁이 되었다고 하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평가를 함에 있어서 루터는 종교적으로 독일의 충성스러은 <민족주의>자 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루터가 만일 보다 더 정의로운 <민족주의>자였다면 루터는 <민중중시 사상>으로 재무장을 반드시 했어야만 했다. 이 점이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의 치명적인 한계와 문제로 남아 있다. 
 
루터에 의하여 출발한 <농민전쟁>이 루터의 무자비한 학살로 인하여 진압된 셈이다. 루터의 위대한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그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농민전쟁이 바로 루터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말살됐다는 사실은 실로 모순덩어리이며 아이러니의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루터의 민족주의적인 종교개혁의 <위대성>은 결국 민중을 외면하고 탄압한 <허구성>이라고 하는 냉철한 역사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주류속에 <민중운동>이 외면당하고 원천봉쇄되는 극단대립의 축으로 전락됨으로 인하여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한 종교개혁이 되고 만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민족>은 있어도 <민중>은 없었다. 인간 역사에 실재하는 것은 <민중>뿐이다. <민족>이란 다만 외부 세계를 향하여 대외적으로 표현하는 민족공동체의 개념의 명칭일 뿐이다. 민족의 양심은 오직 민중의 의지와 민중의 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 루터의 민족주의적인 종교개혁은 민중의 눈물을 외면한 수박 겉할기식의 종교개혁 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3. 루터의 <민족주의>와 뮨처의 <민중주의>에 대하여 
 


▲토마스 뮨처    

토마스 뮨처 (Thomas Muntzer, 1489-1525)는 루터와 함께 중세기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한 독일의 양심적인 신학자였다. 루터와 뮨처는 진보적인 신학자들이었으며 혁신적인 면에서 상호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신학자들 사이에 신학적인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회참여와 현실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두 신학자의 관점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루터와 뮨처의 대립은 신학적인 관점에서의 학문적인 대립이 아니라 독일에서 현실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사회적 부조리에 대처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발생한 대립이었다.
 
루터의 주요 관심사는 이른바 <위로부터>의 주의와 방법이었다. 하지만 뮨처의 주요 관심사는 루터와는 정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주의와 방법론을 주장했다.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큰 틀가운데서 두 신학자는 서로 <위와 아래>로 상반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뮨처는 독일의 산악지대인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신부가 되어 1516년에 수도원 원장이 됐다. 1519년에는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츠비카우에서 설교자가 되었다. 뮨처는 이 도시에서 처음에는 유능한 신학자로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뮨처는 이곳에서 설교자로서 사회적인 갈등을 느끼게 됬다. 츠비카우는 부자들이 사는 호화로운 도시였다. 
 
뮨처는 설교자로 활동하며, 화려한 도시 츠비카우의 한편에서 광부들을 중심으로 사회적 하층계급에 속하는 민중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뮨처는 약자계층을 위하여 신의 위로와 희망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또 이와 반대로 부자들에게는 미래에 신의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이라며 경종을 울리는 종말론적인 설교를 계속했다.
 
1521년에 뮨처는 츠비카우에서 설교권을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결국 추방을 당했다. 추방당한 뮨처는 프라하로 옮겨갔다. 프라하는 당시 혁명의 도시로 유명하며 뮨처는 이곳에서 <프라하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은 자기자신의 신학적인 사상을 집약한 선언문인 동시에 민중들을 위한 뮨처의 사명감이 포함된 선언문이었다.
 
뮨처는 계속하여 목회 장소를 이동하여 알쉬테트와 윌하우젠에서 활약을 했는데 뮨처는 혁명적인 목회를 계속했다. 뮨처는 월하우젠을 혁명의 거점으로 삼고 그곳에서 <농민전쟁>을 주도했다. 뮨처의 설교는 옮겨간 장소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고 기득권 세력을 공격하고 농민과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설교를 계속했다.
 
뮨처는 독일 교회들이 교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민중들을 착취한다고 폭로하는 설교를 계속했다. 그의 설교는 혁명적인 설교로 유명했다. 이로 인하여 뮨처와 루터는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적으로 변했으며 루터는 뮨처를 향하여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루터와 뮨처는 독일에서 처음에는 종교개혁을 함께 시작한 신학적 동지였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수도원 밀실에서 잉태되고 영감을 받아 시작됐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산층이상의 시민을 대상으로 하여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중산층을 위한 새로운 개혁적인 교회를 출현시키려고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뮨처는 종교개혁의 목표를 처음부터 도시의 빈민들과 민중들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는 사회개혁과 교회개혁을 동시적으로 추진하는 종교개혁을 주장했다. 뮨처는 주장하기를 <신의 정의를 배반하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는 많은 민중들을 구출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시급한 중요한 임무이다>라고 주장했다.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은 시간적으로 전후 관계가 결코 아니며 동시적으로 종교와 사회의 변혁을 위한 혁명적 사명이 수행되어야 한다라고 뮨처는 주장했다. 사회혁명이 수반되지 않는 개인적인 종교개혁 자체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뮨처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인간이 억압된 상태 아래 있으면서는 종교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뮨처의 주장이었다.
 
독일의 <농민전쟁>과 뮨처의 신학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500년대에 독일에서 귀족들과 영주와 군부 기사들이 토지의 전부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왕과 영주들과 귀족들 그리고 기사들이 토지의 소유권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농노제도>가 필요했으며 이는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농노들, 농촌에서 탈출하여 도시로 이주해온 빈민들, 사회적으로 몰락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가담하여 이른바 <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사실에 있어서 독일에서 발생한 <농민전쟁>은 스위스 농민전쟁(1513-15년)과 연관 하에 발생했다고 본다. 하지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뮨처의 설교가 독일 농민전쟁의 기폭제가 됐다.
 
루터는 로마 교황을 악마로 여기고 교황제도를 무너뜨린 것을 독일 교회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점에 있어서는 루터와 뮨처 사이에 하등의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루터는 독일의 농민들이 무력으로 <농민전쟁>을 일으키는데 대하여는 반대하여 오히려 분노를 나타내고 있었다.
 
1524-25년에 농민전쟁은 격심해 지면서 12개조항을 발표했다. 12개조항을 요약하면 ㄱ. 농토의 정당한 분배, ㄴ. 소작농의 완전한 보장,  ㄷ. 봉건적인 노예제도의 철폐를 요구했다. 뮨처는 독일 농민들이 주장하는 12개조항을 적극 지지했다.
 
독일 교회에서 이어지는 뮨처에 대한 추방명령으로 인하여 오히려 뮨처는 독일 농민들의 추앙을 받는 유명한 혁명가가 되고 있었다.
 
독일의 <농민전쟁>은 뮨처가 파면을 당하고 또 추방을 당한 지역에서 보다 더 치열했는데 교회에서 성상들이 파괴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농민전쟁>에 대하여 양진영에서 상이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뮨처의 농민전쟁에 대한 견해는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농민전쟁을 <신의 선택된 자들>과 <신을 배반하는 악마들> 사이의 전쟁이라고 악의적으로 주장했다.
 
1525년 4월에 <농민전쟁>은 독일 전역으로 확대되어 많은 지역들과 또 많은 지원자들을 화보하여 전투의 성과를 거두어 들이고 있었다. 뮨처는 농민군 뿐만 아니라 광산 노동자들도 규합하여 강력한 민중의 군대를 조직하여 6,000명의 전투력을 확보하여 지주들과 제후들을 공포로 떨게 했다.
 
독일의 <농민전쟁>은 정의로운 민중들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뮨처의 신학적인 신념으로 창설된 민중의 농민군은 강자들의 멸시와 천대를 물리치고 해방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전투에 용감히 가담했다. 농민전쟁은 초기에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뮨처는 농민군에게 격려의 말로 <숫적으로는 열세이지만 신의 도움으로 승리를 확신한다>고 격려를 했다.
 
하지만 농민군 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군주들과 제후들이 뮨처의 농민군의 공격을 받고 그대로 앉아 있지는 않았다. 지주들과 제후들은 군주의 후원을 받아 막강한 병력을 조성하여 <슈바벤 동맹군>을 결성했다. 제후들의 동맹군은 독일의 남부지역인 라이프하임에서 <농민군>을 격파하여 1,000여명을 살해하고 농민군들의 시체를 도나우강에 내던졌다.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한 사실은 제후들이 후원한 <슈바벤 동맹군>의 배후에는 루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루터는 뮨처의 농민군에 대하여 혹평하여 말하기를 <신을 불경스럽게 이용하고 있는 농민군을 철저히 진압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제후들에게 요청하여 1525년 5월에 농민군 1,000여명을 살해했던 것이다.
 
루터는 제후들에게 편지를 보내 지시하기를 <신의 이름으로 뮨처의 농민군 폭도들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루터는 자기자신의 신분이 로마제국과 교황의 위협과 박해 속에 처해 있을 때 자기를 보호해준 군주들과 제후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동조하고 있었다.
 
루터와 뮨처는 한때 같은 신학적 동지이며 또 같은 독일 교회의 신부들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뮨처를 처형하라고 제후들에게 요청한 것은 바로 루터였다. 뮨처의 농민군은 창이나 칼 같은 변변치 않은 무기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으면서 농민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루터가 요청한 제후들의 <슈바벤 동맹군>은 총과 대포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빈약한 농민군이 대항하여 싸울 수가 없었다. 뮨처의 농민전쟁은 1525년 5월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525년 5월에 농민군을 격파한 <슈바벤 동맹군>의 뒤에는 루터가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므로 루터에 대한 적개심이 수 백년이 지난 21세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일 남부지역 라이프하임에는 변함없이 살아 있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독일 남부의 라이프하임 주민들은 독일의 국교가 된 루터교를 끝까지 반대함으로써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금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루터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지금까지도 루터교를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가 당시 독일의 부르조아 자본주의에 의지하여 종교개혁을 성취하려고 꿈꾸었던 종교개혁의 결과는 오늘 독일의 루터교회에서 찾을 수 있는데, 현재 독일 루터교회는 종교개혁의 기본적인 원리의 모습조차도 찾아 볼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독일 5마르크권 지폐에는 토마스 뮨처를 기념하는 뮨처의 초상화가 인쇄되어 있다. 독일에서 승리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간 곳 없이 사라져 없어졌지만 독일에서 실패한 뮨처의 농민전쟁은 오히려 오늘 독일 지폐에 인쇄된 뮨처의 초상화를 통하여 역사적으로 승리자임을 과시하고 있다.
 
독일 루터교의 감추어진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과 한국 기독교의 서구적인 선교의 방법에 있어서 감추어진 역사적 배경에는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고 가히 생각된다. 루터와 뮨처의 대립은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서도 분명히 노출되고 있다.
 
 

 

글을 맺으며
 
독일의 뮨처가 일으킨 <농민전쟁, 1523-1525>을 고찰하면서 한국과 관련지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조선의 <동학 농민전쟁, 1893-1895>이다. 독일의 <농민전쟁>을 주도한 뮨처가 동역자인 루터의 모략에 의하여 실패하고 처형을 당한 것은 비극이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동학 농민전쟁>을 주도했던 전봉준이 조병갑, 김개남 등을 비롯한 파벌의 모략에 의하여 실패하고 비참하게 처형을 당했다.
 
루터의 후계인 독일의 루터교가 생태적으로 초창기부터 정치적인 기득권 세력과 유착된 교회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기독교도 초창기부터 태생적으로 선교사를 통하여 외세에 의지한 것과 정치적으로 기득권 세력과 유착된 교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독일 교회와 한국 교회의 닮은 꼴이다.
 
하지만 독일과 한국이 다른 점이 있다. 독일은 동서로 분단된 역사를 극복하여 동서의 통일을 성취했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도 분단의 비극을 면치 못하고 남과 북이 여전히 분열되어 있으니 독일과 비교하면 심히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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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stin 2014/08/17 [13:21]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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